※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씨와의 인터뷰를 담은 첫 번째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28)씨가 '범죄피해자들을 위해 살겠다'는 인생 목표를 세우기까지, 그 역시 수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피해자가 설 자리 없는 형사사법체계 안에서, 그는 스스로 공부했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냈다. 언론 인터뷰나 국회 국정감사 참고인 요청을 마다치 않고 모두 응했더니, 국가도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10일 부산에서 만난 진주씨는 "이런 일이 왜 저한테만, 한 번에 일어 났을까요"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2022년 11월 사건이 처음 공론화되기 전까지 6개월간 진주씨는 수사에서도 재판에서도 철저히 소외돼 있었다. "(가해자) 한 사람한테만 가해를 받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경찰한테도, 검찰한테도, 법원한테도 가해를 받으니 너무 힘들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사건 발생 직후'였다. 두피가 열리는 심각한 외상과 뇌신경 손상으로 인한 다리 마비, 해리성 기억상실까지 겪은 진주씨는 병상에 누워 '상상의 구렁'에 빠졌다고 한다. 가해자 이현우(32)가 사흘간 도주를 벌인 터라 사건의 경위도 미궁 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가장 무섭고 가장 소심했고 가장 우울했어요." 가해자가 전과 18범이라는 점, 수사 기관에 '기분나쁘게 째려봐서 때린 거 같다'고 진술했다는 점은 모두 언론 보도를 보고 처음 접했다. 경찰은 피해자인 그에게 아무 정보도 주지 않았다. 가해자의 이름은 '개인 정보'란 미명 아래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다.
1,000만 원이 훌쩍 넘는 수술비도 큰 짐이었다. 김씨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결국 진주씨 아버지는 적금을 깼다. 병상에 누워 경찰의 피해자 조사를 받고 나니 손에 들린 건 '피해자 지원 제도'라고 적힌 A4 한 장 안내문이 전부였다. "피해자 인권이 종이 한 장에 다 담겼단 생각에 실소가 나오더라고요. 기억력도 인지력도 떨어진 피해자들에게 안 하느니 못한 안내라고 봐요."
그래도 진주씨는 "피해자 전담 경찰관이 (제도를) 안내해줬으니, 치료비 지원도 알아서 해 주겠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료비 지원을 담당하는 검찰청 피해자 지원 부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2022년 10월 진주씨가 먼저 수화기를 들었다. 검찰에선 "11월에 한 번 더 연락을 주면 면담 일자를 잡자"고 답했다.
그러던 중 가해자 이현우의 1심 선고날이 왔다. '징역 12년'형을 납득할 수 없던 진주씨는, 일주일 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저는 12년 뒤 죽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인기 조회수 글에 올라가자마자 검찰에서 갑자기 내일 오라고 전화가 왔어요. 너무 허탈했죠." 미적대던 기관이 한 달 만에 진주씨의 병원 치료비(1,200만 원)와 구조금(1,900만 원)을 지급했다.
항소심 도중 언론을 통해 진주씨 사건이 공론화면서, 주거이전비(전세 대출) 지원과 법무부의 스마일공익신탁 대상에도 선정됐다. 진주씨는 "이례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았다고 생각해 어쩌면 특혜 받은 거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연계도 돕지 않았던 기관들이 공론화 이후 하나같이 친절하게 진주씨를 대했단다.
법정에서도 진주씨는 '제3자'라는 한계를 넘기 위해 일부러 벽에 부딪혔다. 숨지 않았다. "처음엔 법정엔 들어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런데 중상해 혐의만 적용된 걸로 알던 아빠가 전화와선 '경찰 친구가 말하길, 징역 2, 3년 산다더라'고 했어요. 3년 뒤 나올 사람인데 내가 못 알아보면 너무 무섭잖아요. 얼굴이라도 확인하러 가야겠다 싶어서 간 거죠." 진주씨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법정에 들어섰지만, 법정 경위는 그를 제지하며 구석으로 가라고 했다. "'내가 왜 숨어야 되지? 에라 모르겠다' 생각해 정중앙에 앉았어요. 그때부터 마인드가 바뀐 거죠. 그뒤론 법정에서 일부러 조금 더 밝게 입고, 화려하게 입으려고 했어요." 그렇게 진주씨는 첫 재판부터 모든 기일을 다 챙겼다.
진주씨는 첫 공판에서 범행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을 처음 봤다. 그리고 '7분의 사각지대'가 있었단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때 확신했죠. 단순 폭행이 아니라 성범죄가 있겠구나. 응급실에서 제 옷을 갈아입혀주던 언니가 '네 속옷이 왜 종아리에 걸쳐져 있냐' 물었던 게 퍼즐처럼 맞춰지더라고요." 그는 'FBI수사기법' '최신범죄심리학' 같은 서적도 찾아 공부하며 가해자 성향까지 스스로 추론했다. 항소심 때부턴 피해자 의견서를 수차례 내면서 "입고있던 바지 안쪽의 DNA를 다시 검사해달라"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해 재판부도 움직였다. 재판부는 검찰 측에 추가 DNA 검사를 요구했고, 이후 공소장에 적힌 이현우의 혐의가 '살인미수'에서 '강간살인미수'로 변경됐다. 그 덕에 징역 12년은 20년이 됐다.
지난해 10월 가해자가 징역 20년형을 확정받은 뒤, 진주씨 사건은 국정감사장에서도 '핫이슈'가 됐다. 범죄피해자들이 소외된 현행 사법체계를 두고 여야 의원들이 한마음으로 질의를 나눴다. 특히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피해자 지원이 미흡했다"고 지적하니,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고개를 숙였다.
이튿날 진주씨에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동훈 장관이었다. 그는 진주씨에게 거듭 사과를 전했다. 이윽고 "피해자 지원제도, 어떤 점이 문제라고 보냐"는 질문에 진주씨는 이렇게 답했다. "피해자들에 대한 제도들이 너무 미진한 건 아시지 않나요. 이걸 어떻게 한 통화로 끝낼 수가 있겠어요. 메일 주소를 전달해주면 관련된 문서를 정리해서 보내드리는 게 어떨까요."
진주씨는 그간 느낀 피해자 지원 제도의 한계와 수사~재판단계, 재판 후 단계에서 필요한 점을 정리한 문건을 보냈다. 그의 제안 내용에는 △범죄피해자들의 자립을 위한 긴급 대출 제도 △범죄피해자 유급휴가 제도도 있다. 특히 진주씨는 "경찰과 검찰 수사 단계에서 분절된 지원 체계를 경험했다"며 수사 시작부터 연속적인 지원을 맡을 센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피해자 지원에 관한 표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서 지역과 담당자별 편차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
법무부는 지난해 하반기 장관 지시로 범죄피해자 지원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양방향 알림이 가능한 스마트 워치 도입 △피해자의 재판 참여권 확대(기록 열람·등사권 보장) 등 진주씨의 제안이 정책에 거의 그대로 반영됐다. 법무부는 올해 상반기까지도 진주씨 같은 아픔을 방지하도록 여러 제도 개선과 법안 마련을 계획하고 있다. 7월엔 진주씨가 제안했던 '원스톱솔루션센터'도 서울 동작구에 처음 문을 연다. 경찰청, 검찰청, 여성가족부 등 여러 부처·기관에 흩어져있던 지원 제도를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내용의 '원스톱 지원체계'도 처음 구축된다.
지난해 10월 진주씨는 한 전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부디 피해자가 언론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사법체계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다음은 편지 내용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