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제재… "러시아산 석유, 인도 거쳐 영국 버젓이 수입"

입력
2024.02.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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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원유 정제 항공유 영국서 대량 유통"
대러 제재 불구 '원산지 규정' 허점 탓

'푸틴의 돈줄'을 말리기 위해 서방이 금수 조치한 러시아산 석유가 버젓이 영국으로 우회 수입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국경 바깥에서 가공된 항공유·디젤유 등 석유 제품의 경우 원산지 '세탁'이 가능한 규정상 허점이 악용된 결과다.

서방은 이런 문제를 알면서도 러시아산 원유로 만든 석유 제품 완전 금수까지 손대지는 못하고 있다. 이를 모두 막을 경우 전 세계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러 석유 수입 없지만 제품은 영국 유입

5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이 입수한 비정부기구 글로벌위트니스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산 원유를 정제한 석유 제품 약 520만 배럴이 영국으로 수입됐다. 이 가운데 460만 배럴이 항공유로, 영국 항공편 20회 중 1회꼴로 이 연료가 사용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핀란드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의 또 다른 보고서도 2022년 12월부터 1년간 영국에서 러시아산 원유로 만든 석유 제품 약 5억6,900만 파운드(약 9,494억 원)어치가 유통됐다고 추정했다고 BBC는 전했다.

이는 '원산지 규정'상 허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러시아산 원유라도 인도에서 가공을 거친 석유 제품은 원산지가 인도로 분류된다. 인도산으로 둔갑하면 '합법적'으로 영국 수입길이 열린다. 이 경우 "불법이 아닐뿐더러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를 위반하는 것도 아니"라고 BBC는 짚었다. 영국 정부도 "2022년 러시아 제재 이후 러시아산 석유 수입은 없었다"는 게 공식입장이다.



제재 약발 떨어져… 서방 '딜레마'

세계 3위 석유 생산국인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다. 서방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원유를 배럴당 60달러 이상으로 거래하지 못하도록 상한제를 두는 등 제재에 나선 이유다. 하지만 원산지 규정상 허점은 이런 대(對)러시아 고강도 제재의 효과를 약화시킨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을 지난해 예측치(1.1%)의 두 배인 2.6%로 올려 잡았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먹혀들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아이작 레비 CREA 유럽·러시아 책임자는 "원산지 규정의 허점은 러시아산 원유 수요를 증가시켜 판매량을 늘리고 가격도 오르게 한다"며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으로 유입되는 전쟁 자금도 늘어날 수 있다"고 BBC에 말했다.

러시아가 자국산 원유를 정제한 석유 제품을 영국에 팔아 얻은 간접 수익은 1억 파운드(약 1,667억 원)가 넘는다고 CREA와 글로벌위트니스는 추산했다. 대부분 러시아 제재에서 발 빼고 있는 인도와 중국에서 정제되는 석유 제품을 통해서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산 원유로 만든 석유 제품까지 전면 금수 조치를 취해줄 것을 서방에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간단치 않다. 물류 정보업체 케이플러의 맷 스미스 애널리스트는 "러시아산 원유나 러시아산 원료로 만든 석유 제품을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석유 제품 물량 부족으로) 에너지 가격 급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권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