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무죄'로 결론 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1심 판결문엔 피고인 양 전 대법원장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인 그의 이름은 3,200쪽 판결문에서 무려 4,000번 이상 언급된다. 재판부는 직권남용 등 범죄 사실 대부분을 임 전 차장이 실행에 옮긴 것으로 보아, 이른바 '사법농단'의 몸통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이달 5일. 정작 임 전 차장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일부 유죄 취지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도 일부 혐의에 대해선 아예 직권남용이 인정되지 않는다거나 부적절하지만 처벌할 정도의 위법성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재판부의 다른 판단 및 그 근거는 상급심(고법·대법원)에서 가장 쟁점으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6일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의 1심 판결문을 비교해, 같은 혐의지만 양 재판부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린 부분을 짚었다.
두 재판부 판단이 엇갈렸던 대표적 범죄 사실은 임 전 차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와해를 위해 관련 대응방안을 검토하도록 한 대목이다. 당시 사법부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 등 주요 정책방향에 대해 해당 모임 구성원들이 반대하자 이들 모임을 무너뜨리려고 했다는 게 검찰 시각이다. 결국 연구회 중복가입을 금지해 법관 101명이 연구회를 탈퇴했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이를 두고 "법관 표현의 자유 및 연구 자유를 침해하는 내용의 대응방안을 검토하도록 한 것은 위법·부당한 지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임 전 차장 재판부는 이 부분 관련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를 모두 무죄로 선고했다. 재판부는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가 특별권력관계 내 존재하는 결사(단체)라고 설명했다. 즉 행정처장이 설립을 허가하고 법원 지원을 받으며 성과를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광범위한 결사·학문의 자유를 누릴 수 없고 예규가 정한 권리만 갖는다"는 것이다. 일반적 결사와 다르다는 이 판단은 결국 설립허가 주체인 행정처의 재량권이 인정된다는 얘기. 결국 "인사모 등 활동 내역이 예규에서 정한 활동범위를 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결론의 근거가 됐다.
다만 2017년 '중복 가입한 전문분야연구회 탈퇴 등에 관한 안내말씀' 문건 작성 등에 대해선 직권남용이 맞다고 판단했다. 소속 법관들로부터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는 등의 절차적 정당성이 없었다는 취지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급자에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중복가입 금지가 예규에 규정돼 모든 법관이 준수해야 할 규정이었단 판단의 근거가 됐다. 예규로 제정하면 직권을 남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재판 개입에 대한 판단도 엇갈렸다. 2016년 헌법재판소와 중복 심리하게 된 '매립지 귀속 분쟁 관련 사건' 중 일부를 조기 선고하라며 개입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에게 지시한 것을 직권남용으로 판단한 것인데, 임 전 차장 재판부는 이를 "재판 관여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관 재판에 필요한 정보 제공이 재판연구관 임무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는 재판연구관 증언이 근거였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가 "임 전 차장의 직권남용"으로 판단한 '헌재소장 비난 내용의 기사 대필 지시'와 관련한 부분 역시 임 전 차장은 무죄를 받았다. "언론사에 참고자료로 제공한 것에 불과하고 대외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법원행정처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이유였다.
반대로 임 전 차장 재판부만 유죄로 판단한 부분도 있다. △공보관실 운영비 편성 및 집행과 관련한 업무상 배임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 관련 고용노동부 재항고이유서 작성 지시 등이다.
이번에 하급심에서 엇갈린 판단들은 고법이나 대법원까지 가야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법센터는 성명을 내고 "한정된 혐의에 대해서만 범죄 성립을 인정해 임 전 차장이 저지른 범죄의 중대성을 축소한 1심 판결"이라면서 "사법농단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