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기업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정조준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1심은 재판부가 그룹 수뇌부 전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일단락됐다. 법원은 검찰이 제시한 핵심 증거 상당수의 증거능력을 부정했고,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불법 경영권 승계 목적이었다는 검찰의 기본 전제를 결국 부인하면서 23개 범죄사실을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앞서 금융당국이 분식회계로 결론 내린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의혹’에 대해서도, 삼성 측의 ‘지배력 변화’ 논리가 타당하다며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5일 이 회장의 구체적인 공소사실에 대한 판단에 앞서 검찰이 제시한 주요 증거의 증거능력에 대해 판단했다. 제일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다량의 서버 내용 등의 증거능력을 부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별건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가 저장한 전자정보가 임의 제출된 경우 혐의와 무관한 전자정보에 대해서는 별도로 압수수색 영장을 받는 등의 절차를 밟았어야 하는데, 검찰이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렇게 주요 핵심 자료들이 증거로 채택되지 않으면서 검찰의 논리는 무너져갔다. 재판부는 이 회장의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의 핵심인 물산∙모직 합병에 대해 △추진 주체 △목적 △방식을 나눠 따졌다. 그러면서 일단 ①합병이 미래전략실 차원의 독단적 작업이었다는 검찰의 가정부터 깨고 시작했다. 합병은 미전실이 아닌, 경영 위기 극복을 노력 중이던 물산이 ‘태스크포스(TF)’를 통해 추진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취지다. 합병이 미전실의 일방적 결정이 아닌 이상, 물산 및 물산 주주의 손해를 의도했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는 판단이다.
②’약탈적 합병’의 스모킹건으로 지목됐던 ‘프로젝트-G’에 대해서도 법원은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비록 해당 문건에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성으로 ‘대주주 지분율 강화’ 등이 언급되긴 해도,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 유지를 위한 다양한 사업 방안 검토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검사의 증거만으로는 문건이 불법적 내용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③'모직에 유리한 합병 비율(모직:물산=1:0.35)을 만들기 위해 물산에 불리한 시점을 택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회계법인 딜로이트안진이 삼성 측 강요로 비율 검토 보고서를 조작했다는 의혹은 안진 관계자들의 법정 증언을 근거로 물리쳤다. 검찰에서의 진술과 공판에서의 진술이 상반될 때는 공판에서 형성된 증거를 우선한다는 ‘공판중심주의’에 따른 결론이었다.
이렇게 '불법 경영권 승계'라는 의혹의 핵심에 실체가 없다는 재판부 판단에 따라 이에 근거를 둔 △거짓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금융투자업자 분석 보고서 왜곡 △여론 조작 △시세 조종 등 공소사실도 잇달아 무죄 판단으로 이어졌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만으로는 삼성이 공표한 내용들이 잘못됐다고 보기 어렵고, 상당수 사업들은 실제로 삼성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던 것”이라고 밝혔다.
앞선 ‘국정농단’ 사건을 판단한 대법원이 경영권 승계 작업의 불법성을 인정했던 것을 논리 강화의 재료로 쓰려던 검찰 전략도 무위에 그쳤다. 재판부는 2019년 대법원이 삼성에 승계작업이 있었다고 인정한 건, 미전실을 중심으로 승계작업을 벌였다는 뜻이지, 그 과정의 위법성까지 따진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합리적 사업 목적이 존재하는 이상 지배력 강화 목적이 있다고 해서 전체가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불법승계 의혹의 시발점이 된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도 법원은 “필요에 따른 원칙적 처리였다”는 삼성바이오 해명이 합당하다고 봤다. 승계작업 여파로 제일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자본잠식 위험에 처하자,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 회계처리 방식을 자의적으로 바꿔 기업 자산가치를 부풀렸다는 게 검찰이 적용한 혐의였다.
재판부는 2015년 에피스를 둘러싼 지배력 변화가 실재했다고 판단했다. 비록 계약서상 바이오젠이 콜옵션을 ‘50%-1주’까지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기는 해도 로직스가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장악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 돼 있는 한, 콜옵션 행사 가능성이 가시화되기 전까진 로직스의 실질 지배력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는 취지다. 에피스가 2015년 제품 판매승인을 최초로 받기 전까진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웠다는 삼성 측 주장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