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서울 마포구 카페에서 박영자(가명·69)씨를 만났다. 그는 아들 약 줄 시간을 맞추느라 조금 늦었다면서 보청기를 매만졌다. 청각장애가 있는 영자씨는 사람 없는 한적한 가게에서도 힘주어 말하는 게 습관이 된 듯했다. "귀뿐이겠어요. 여기 종아리에 퍼런 혈관 불뚝불뚝 튀어나온 하지정맥류도 진작 수술했어야 하는데. 못했죠. 그럴 짬이 있나."
이날이 간만에 아들을 두고 혼자 한 외출이라는 영자씨. 엄마는 4년 전 아들이 다친 '그날'의 날벼락을 생생히 기억한다. 추석 다음 날이던 2020년 10월 2일이었을 거다. 경기 의정부에 혼자 떨어져 사는 둘째 상민(가명∙44)이 소식을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단다. 몇 해 전 첫째인 형이 먼저 떠난 뒤 혼자 남은 자식이라, 명절이면 유난히 마음이 쓰이는 아들이었다.
전화는 그러나 뜻밖의 곳에서 걸려왔다. 용산경찰서였다. "애가 의식 불명 상태로 대학병원에 실려갔다는 거예요. 이태원 길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걸 누가 신고했다고." 근처 폐쇄회로(CC)TV 영상엔, 생면부지 취객이 다가와 상민씨를 갑자기 식당 난간 밖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모습이 있었다. 상민씨는 아래로 추락했고, 그렇게 쓰러져 약 14분간 목이 꺾인 채 방치됐다.
한달음에 달려간 병원. 아들은 중환자실에 누워 온갖 호스를 단 처참한 모습으로 엄마를 맞았다. "뇌와 가장 가까운 경추 1번을 다치고 몇 분간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대요. 처음엔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했어요."
상민씨는 며칠 뒤 눈을 떴다. 그러나 목 아래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3개월 남짓한 입원 생활을 마치고 주 3회 통원 치료를 할 즈음, 주치의는 "재활에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후암동 언덕배기 집에서 병원까지, 키 178㎝ 건장한 아들을 업고 다닐 엄두가 나질 않아 영자씨 부부는 결국 병원 근처 호텔에 장기 투숙을 결제했다. 평소엔 언감생심 가볼 생각도 않던 곳이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였다. 호텔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영자씨가 사정사정 숙박비를 깎는 데 성공했지만, 하필 호텔이 격리∙치료 시설로 전환돼 방을 빼줘야 하는 일이 반복됐다. 세 식구는 이불, 옷, 그릇, 숟가락만 챙겨 중고 다마스에 싣고 8개월간 여섯 곳을 전전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영자씨 남편은 상하의 한 벌로 봄과 여름을 보냈다.
그 시기를, 영자씨는 "가족 모두 빼빼 말라가던 때"로 기억한다. 전에도 벌이라곤 영자씨가 아파트 청소로 받는 90만 원과 남편이 배달 일로 근근이 보태는 50만 원이 전부였지만, 간병에 전념하면서 가계 수입은 '0'이 됐다. 소화가 어려운 아들에게 유동식과 유산균을 사먹이면서, 엄마 아빠는 병원 식당에서 나온 김치를 맨밥에 삼켰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수중에 있는 300만 원으로 변호사를 쓰고 나니, 당장 중환자실 입원비 800만 원을 낼 도리가 없었다. 합의 제안을 받기는 했지만, 그랬다간 가해자에게 구상권이 청구되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부담금 수천만 원을 영자씨 가족이 떠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관뒀다. "그때는 누가 보든 말든 매일 남산자락을 울면서 걸어다녔어요."
힘이 돼 준 건 서울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였다. 정부 위탁을 받아 범죄피해자를 지원하는 센터 덕에 급한 병원비와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장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나오는 구조금을 신청하려다가, 함부로 진단서를 떼 줄 수 없다는 병원 측과 실랑이가 붙기도 했다. 그래도 그 1,000만 원을 포기할 수 없어 영자씨는 병원 문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혼자 앉지도 못하던 아들이 보조기구를 잡고 겨우 한 발자국 떼기까지 거의 4년이 걸렸다. 그 기적이 찾아올 때까지, 세 식구는 정든 집을 떠나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갔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가해자는 사건 이듬해 항소심에서 감형돼 징역 3년을 확정받았다. "나 죽고 나서도 애 혼자 살아갈 수 있을지. 그게 제일 걱정이죠." 영자씨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이렇게 말했다.
범죄에 일상이 무너진 건 김현숙(가명∙71)씨도 마찬가지다. 남편 병시중을 하면서도 외동아들에게 손 하나 빌리지 않고 살림을 꾸렸던 건, 크진 않았어도 15년을 꾸려온 노래방 덕분이었다. 그러던 2016년 9월, 현숙씨는 바로 그곳에서 단골손님의 성폭행 시도를 피하려다 전치 10주 중상을 입었다. 자궁과 무릎인대까지 손상돼 입원만 열흘 넘게 했다고 한다.
현숙씨는 "반항하면 죽일까봐 무서워서 '너 왜 그래' 소리밖에 못한 게 너무 분하다"고 가슴을 쳤다. 동시에 "그날 이후 음료수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카운터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계약 기간이 한참 남은 가게를 내놨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1년 전 세상 떠난 남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남은 건 집 한 채, 그리고 남편을 간병하며 얻은 빚 1억 원이었다. 장사만 30년 한 중년 여성을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결국 지인과 함께 전국 곳곳 공사 현장을 다녔다. 부산에서 원룸을 잡아 셋이 숙식을 해결하고, 점심값이 아까워 새벽부터 일어나 3인분 도시락을 쌌다. 월 100만 원 남짓 받으며 1년이 지나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려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요양보호사 일자리를 구한 적도 있었다. 나이 예순여덟 때다. 시어머니 살아 계실 적 직접 간병한다고 따놓은 자격증이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젊은 사람을 쓰고 싶다"는 보호자 요구에 오래 하지 못했다. "그렇게 잘리니까 일할 맛이 똑 떨어지고 너무 비참하더라고. 남처럼 한가하게 여행 다니는 꿈꿀 여유도 없이 살아왔는데요."
현숙씨도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첫 입원비와 월 50만 원 생계비를 한 번 받은 걸로는 부족했다. 연금 빼고는 돈 나올 구석이 없어 결국 처음으로 아들에게 "한 달에 30만 원씩만 보태달라"는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그 돈으로 현숙씨는 마스크를 산다. 혹여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가해자가 가석방이 되어 동네에서 마주치기라도 할까봐.
영자씨 모자와 현숙씨가 이런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과정에, 그들의 잘못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나쁜 시간에 나쁜 장소에서 나쁜 인간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범죄 피해 자체도 힘들었지만 이후 생활이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입을 모았다. 영자씨는 지체장애인 아들 앞으로 나오는 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 병원과 주민복지센터를 들락날락거려야 했고, 현숙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이 들어 몸 쓰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이 세상에 바라는 건 단 한 가지다.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어요. 범죄피해자들이 먹고살 걱정만 없이, 치료받는 데 불편함만 없도록만 해주세요."
※범죄피해자 지원제도의 문제점과 부족한 지원금을 다루는 후속 기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