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A씨(56)는 2021년 4월 29일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 관련 주가연계증권(ELS) 가입 당시 은행원에게 거듭 원금보장 여부를 물었다. 그날 그가 3년 만기 정기예금을 들기 위해 주거래 은행에 들고 갔던 3,700만 원은 결혼 27년간 모은 전 재산이었다. 3년 뒤 결혼 30주년 기념 스위스 여행을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준비하고 싶었다.
3,700만 원은 3년 만기 정기예금이 아닌 3년 만기 ELS 투자금이 됐다. 서글서글한 인상 때문에 눈에 익었던 창구 직원은 "받으실 수 있는 이자가 1%가 채 안 되는데 국가가 세금(이자소득세율)까지 떼 간다"며 "이런 상품이 있는데 그나마 이자를 꽤 쳐 준다"고 했다. 그게 ELS였다.
"고객님, 이걸로 여태까지 손실 본 사람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하도 걱정을 하시니까 만기가 제일 긴 3년으로 하시면 원금 보장 안 될 이유가 1%도 없어요." '손실 위험' 문구에 A씨가 거듭 불안해하자 판매 직원은 자신의 엄마, 고모에게도 추천한 상품이라며 안심시켰다. 확신에 찬 직원 말에 믿음이 갔다. A씨는 사인을 이어갔다. 다음 날 걸려 온 전화(해피콜)에도 모두 "네" 하고 답했다. 직원이 '그건 잘 모르는데'라고 하면 가입이 안 된다고 해서다.
원금 손실 위험을 처음 인지했던 건 지난해 초다. 계좌에 '마이너스(-)'가 찍히기 시작하자 지점에 전화를 했다. 근무지 이동으로 바뀐 담당자는 A씨에게 원금 손실 가능성을 고지했다. 새 담당자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콜센터에 확인 전화를 했다. 손실이 나는 게 맞지만 위약금이 크다고 해 해지할 수 없었다.
그는 "H지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지, 다른 두 지수(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500, 유로스톡스50)는 엄청 올랐는데 H지수 하나 떨어지는 것으로 왜 손실을 본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저 "ELS는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예금보다 훨씬 잘한 선택"이라는 또 다른 창구 직원의 말을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현재 A씨 계좌 평가액은 반토막이 났다.
'예금 대신 ELS 가입했다'는 사례는 금융소비자단체에 심심찮게 접수된다. 2021년 3월 30년 주거래 은행에서 정기예금 대신 ELS에 가입한 50대 전업주부 B씨는 "연 3.9% 이자에 선수수료 1%를 떼면 2%다. 누가 2% 더 받자고 원금 손실 상품에 가입하겠나. 설명도 이해도 모두 부족했는데, 그땐 '10년 넘게 손해 본 적 없다'는 말만 믿었다"고 가슴을 쳤다.
2020년 은행권은 금융감독원과 함께 '은행 비예금상품 내부통제 모범규준'을 제정해 소비자보호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상품판매 시 준수 사항엔 '손실 위험 안내 강화'도 담겼다. '소비자가 최대 손실발생액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A씨, B씨의 경우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ELS 집단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이정엽 로집사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결국 은행 내부통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재까지 소송 접수된 사례를 종합했을 때 "판매 은행원들이 ELS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고, 그래서 '원금이 당연히 보장되죠'라는 말을 함부로 못 하게 하는 철저한 내부 교육이 없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4일 KBS '일요진단'에서 "아직 검사가 완결되진 않았지만 부적절한 판매 사례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며 불완전판매를 공식 확인했다. 이달 중 배상기준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어려운 처지의 금융소비자가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금융사 자율배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