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례를 따르지 않은 1심 판결 때문에 위자료 청구권을 부정당했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손해를 배상받을 길이 열렸다. '소송 걸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청구를 각하했던 1심 판결을 넘겨받은 항소심이 "심리를 다시 하라"며 사건을 1심 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1일 서울고법 민사33부(부장 구회근)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등 18명이 미쓰비시중공업, 홋카이도 탄광기선 등 일본 기업 7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심의 각하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본안 심리도 없이 재판을 끝낸 원심에 문제가 있다는 취지인데, 피해자들은 1심에서 사실관계부터 다시 판단받게 된다.
주로 대법원에서 하는 파기환송 판결이 항소심에서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통상 항소법원은 원심을 깨더라도 별도로 판단(파기자판)을 거친다. 2심이 사건을 돌려보낸 건 그만큼 1심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5년 5월 시작된 이 사건은 1심에 85명에 달하는 피해자 및 유족이 참가하며 '강제징용 관련 최대 규모 소송'으로 불렸다. 그러나 6년의 법정 공방 끝에 재판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보긴 어려워도, 이를 행사할 순 없다"며 각하했다.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 자격 자체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는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 행사를 인정한 대법원 결론과는 다른 판단이었다. 심지어 당시 재판부가 그 이유로 "징용의 불법성은 국내법적 해석에 불과하고, 청구가 받아들여져 일본이 국제재판에 사건을 가져갈 경우 미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등 국익 손상의 우려가 크다"고 한 사실이 알려지며 "판사가 정치적 고려까지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날 2심 재판부가 구체적인 파기환송 이유를 밝히진 않았지만, 법조계에선 "청구권을 인정하는 취지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최근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이 연달아 확정되는 등,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례가 이미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2018년 판결' 이전엔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피해자 측도 판결 직후 "드디어 실체적 판단이 가능해졌다"며 반겼다.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 강길 법률사무소 한세 변호사는 "9년의 세월 동안 돌아가시거나 소송을 포기한 분들이 많다"며 "피해자들의 청구권과 손해를 인정받기 위해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 2심은 항소가 기각되며 1심 판단이 유지됐다. 앞서 1심은 피해자 63명 중 1명을 제외한 나머지 62명에 대해 "작업장에 끌려갔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하거나 각하했다. 강 변호사는 "자료는 일본 기업이나 정부가 갖고 있는데도, 재판부는 '입증 책임은 피해자들에게 있다'는 원칙적 태도만 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