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떡국 먹듯 새해엔 ‘반쯩’… ‘휴가족’ 늘면서 공항도 인산인해

입력
2024.02.02 04:40
15면
<20> 베트남 최대 명절인 음력설 '뗏'
가족 함께 전통 음식 반쯩 만들어 먹어
뗏 앞둔 거리 곳곳은 화려한 붉은 장식
경제 발전하면서 '여행' 떠나는 사람도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 지난달 28일 낮 베트남 중북부 탄호아성에 위치한 짠흐우티에우(60)의 집. 마당에서 베트남 음력설 뗏(Tet)을 대표하는 음식 반쯩(Banh Chung)을 만드는 티에우와 두 남동생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아내와 자녀, 조카들도 부지런히 부엌에서 재료를 나르며 이들을 거들었다.

반쯩은 다이비엣(대월·베트남의 옛 국호, 1054~1804년) 시대부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베트남 전통 명절 음식이다. 한 해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녔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①널찍한 바나나 잎 또는 라종 잎 여러 장을 십자(十) 모양으로 깐다. ②물에 불린 찹쌀을 잎 위에 두툼하게 올리고, 그 위에 녹두와 돼지고기를 올린 뒤 다시 찹쌀로 덮는다. ③소가 꽉 찬 바나나 잎을 네모반듯하게 감싸고 대나무 끈으로 단단히 묶는다. ④이렇게 만든 묶음을 물이 담긴 솥에 10~12시간 찌면 완성된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은 잎 위에 바로 소를 올리지만, 보다 쉽게 네모반듯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나무 틀을 이용하기도 한다. 남부에서는 김밥처럼 둥글고 길쭉한 형태로 만든다. 고소한 맛과 쫄깃한 식감이 한국의 떡과 비슷하다.


이날 재료를 준비하고 반쯩 50여 개를 만드는 데에만 4시간이 걸렸다. 솥에 들어가 있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고된 작업이나, 조상의 제사상에 올리고 가족 및 이웃과 나눠 먹을 생각에 티에우는 힘든 줄 모른다고 했다. 과거에는 티에우의 가족처럼 친지들이 한데 모여 반쯩을 만들었지만, 최근엔 마트에서 ‘사제’를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 새해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면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반쯩은 ‘나이를 더해 주는 음식’이란 의미가 있다. 티에우는 “‘반쯩을 몇 번이나 먹었느냐’는 질문은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며 “보통 1년에 한 번 만드는데, 손이 많이 가고 찌는 동안 돌아가면서 부엌을 지켜야 해 혼자 만들 수 없다. 가족의 단합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대 명절 앞두고 붉은 물결 일렁여

베트남의 음력설 명절 풍경은 같은 동양권 사람이 보기에도 유난스럽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화교 인구가 많은 몇몇 동남아시아 국가도 음력설을 쇠긴 하나, 베트남만큼 연휴를 보내는 데 ‘진심’인 나라를 찾아보긴 어렵다.

통상 뗏이라는 단어 앞에는 ‘최대 명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연중 가장 중요한 공휴일이자, 가장 긴 연휴라는 의미다. 올해 공식 휴무일은 총 7일 동안(이달 8~14일)이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포함해 약 보름 정도 쉰다. 여기에다 개인적으로 휴가를 붙여 더 길게 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쭉하고 교통 인프라가 열악한 탓에 거주지와 고향을 오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한 정부와 기업의 ‘배려’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예전보다 교통 사정이 나아졌다 해도, 지금 역시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1,726㎞를 열차로 이동하는 데엔 1박 2일이 걸린다.


산업 현장 노동자들의 마음도 일찌감치 고향으로 향하는 까닭에 길게는 3주간 생산에 제동이 걸린다. 도시를 가득 채우던 오토바이와 자동차 경적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뗏 기간에는 온 나라가 멈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노이에 7년 가까이 살고 있는 한 한국 교민은 “그나마 최근엔 프랜차이즈나 한인 식당이 뗏 연휴 중 문을 열지만, 6년 전만 해도 미리 장을 봐 두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시장, 마트,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뗏을 앞두고 베트남은 붉은 물결로 일렁인다. 27일 하노이 시내 중심가 항마거리는 빨간색과 금색 장식으로 가득했다. 지인들에게 나눠 줄 새빨간 부채와 등불, 장식품을 구매하려는 베트남 현지인과 설 분위기를 느끼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탕롱황성에서는 전통 춤 공연과 반쯩 전문가의 제작 퍼포먼스가 한창이었다.


다른 쪽에선 시민들이 서예가로부터 새해 행운이 감긴 붓글씨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단어는 부를 의미하는 ‘재록(財禄)’. 성공과 시험 합격을 의미하는 ‘등과(登科)’, 무탈한 한 해를 기원하는 ‘안락(安樂)’도 설 단골 문구다.

거리마다 놓인 형형색색의 꽃 화분도 뗏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1월 중순부터 상인들이 각 도로에 복숭아나무와 금귤나무를 늘어놓으면서 거리는 마치 봄꽃 축제장을 연상케 했다. 통상 남부 지방은 풍요와 희망을 뜻하는 노란색 매화꽃을, 북부 지방은 행운을 상징하는 분홍색 복숭아꽃을 집안 곳곳에 장식한다.



”명절에 가족 모임 대신 여행”

한국과 닮은 모습도 있다. 고향에 가기 위해 ‘민족대이동’급 귀성 전쟁을 벌인다. 뗏 당일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뒤 가족·친지와 함께 명절 음식을 먹고 덕담을 나누며 복을 기원한다.

‘리씨(Li xi)’로 불리는 세뱃돈도 필수다. 어른은 아이에게 ‘건강히 잘 자라라’는 의미로 붉은색 종이 봉투에 돈을 넣어 준다. 수입이 있는 자식과 손주는 부모나 조부모에게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용돈을 드린다. 다만 세배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하는 큰절 대신, 허리만 숙이거나 손을 잡는 악수로 한다.

전통적·가족적인 분위기가 갈수록 흐릿해지고 있는 점마저 비슷하다. 베트남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명절 풍속도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뗏 연휴는 고향에서 가족과 지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긴 연휴 후반에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으나, 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인식됐다.


그러나 소득 증가로 구매력 높은 중산층이나 자녀를 한 명만 낳는 가정이 많아졌고 뗏에 대한 인식도 바뀌면서, 이 기간 국내외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게 베트남 언론의 설명이다. 현지 매체 베트남뉴스는 “청년들은 뗏을 재충전 기회로 생각한다”며 “(이들의) 선택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각 가족에 맞는 결정과 (개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만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실제 이 기간 중 하노이와 호찌민의 공항은 인산인해다. 국외선 터미널은 한국 일본 중국 홍콩 태국 등으로 떠나는 해외 여행객들로, 국내선 터미널은 다낭 나짱 푸꾸옥 등 베트남 내 휴양지를 찾는 사람들로 각각 북적거린다. 베트남 민간항공국에 따르면, 지난달 24일~이달 25일 하노이 또는 호찌민에서 베트남이나 인근 국가 대도시로 향하는 항공편의 예매율은 80~100%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 설 연휴마다 해외 여행을 떠나는 인파로 공항이 미어터지는 것처럼, 베트남도 ‘휴가족’이 크게 늘어나는 셈이다. 현지 매체 VN익스프레스는 지난달 28일 “뗏 명절 열흘 전부터 주요 노선 비행기표와 기차표가 거의 매진됐다”고 전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면서 베트남 국적기 베트남항공(4대)과 저비용항공 비엣젯(4대), 뱀부항공(2대) 등 현지 항공사들은 급하게 여객기 단기 임대에까지 나섰다. 하노이에서 항공권 판매대행사를 운영 중인 팜티투 대표는 “항공사들이 운항편을 증편했지만, 수요 증가 탓에 일반석이 조기 매진되고 일부 비즈니스석만 남아 있는 상황”이라며 “수요가 공급을 크게 앞지르면서 가격도 덩달아 치솟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금기’도 있다. 새해 첫날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한 해의 운이 결정된다는 믿음은 여전하다. 대표적인 게 음력 1월 1일엔 청소하지 않는 풍습이다. 이날 청소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복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돈을 빌리거나 돈을 갚는 것도 불운을 부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날 돈을 빌리면 1년 내내 돈을 빌리게 된다거나, 돈을 갚으면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탄호아·하노이=글·사진 허경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