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권남용'에 최고 수준 깐깐한 잣대… 앞으로 '월권'은 처벌 못하나

입력
2024.01.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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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의혹 1심 판결문 분석]
'직무권한' 해당 행위만 처벌하는 한계
비공식 권력 근거한 '농단' 막기 어려워
해외 입법례 참고한 개정 시도도 무산


"직무에 관한 권한이 없다면,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처벌이 필요하다면 별도 규정을 신설하는 게 타당하다."

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및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에 "전부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무죄 이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특정 법관(대법원장·대법관 포함)에게 다른 법관의 재판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다면, 자기 권한 밖의 일에 관여하는 '월권 행위'를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

애초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를 규정한 형법 123조는 사실상 사문화됐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차원에서 '조자룡의 헌칼'처럼 아낌없이 활용됐다. 이 과정에서 직권남용 혐의를 어떻게 기소하고 판결해야 옳은지 논란이 여러 차례 반복됐지만, 직권남용죄가 사실상 '전 정권 잔재 청산'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쓰이면서 정권이 바뀌면 공수가 교대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제2의 사법농단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기준을 새로 세워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직권남용죄 법리가 지금처럼 자리 잡게 된 건 1990년대 들어서라고 한다. 그전엔 '일반적 직무권한' 여부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직권남용이 주목받은 건 1987년. 당시 치안본부장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에게 박종철 열사 사인에 관한 기자간담회 메모 작성을 요구한 사건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직권남용은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와 구별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문제는 이를 근거로 직권남용 인정 범위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더 큰 월권의 처벌이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재판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기업 광고 발주 요구 혐의 등에 대해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일 뿐 직권남용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렇게 되면 특정 조직의 실세 등이 비공식적 권위로써 압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사실상 처벌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국민 법감정과 어긋나는 판단이 잇따르자 입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서기는 했다. 20대 국회에서 독일의 '법왜곡죄'를 본뜬 법안이 발의됐다. 법관이 당사자 일방에게 유리 또는 불리하게 법을 왜곡 적용하면 처벌하는 조항으로, 2018년 발의된 심상정 의원안에서 형량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입법엔 한계가 있었다. 조문 의미가 불명확해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질 수 있는 데다, 법관의 재판∙직무상 독립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을 봐도 '왜곡 행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다. 독일의 법왜곡죄가 나치 체제에서 자행된 불법행위를 단죄하기 위한 특수성을 지녀, 한국 법체계에 바로 접목하기도 쉽지 않았다.

21대 국회에서도 유사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진전된 논의는 없었다. 직권남용죄에 '지위를 이용한 경우'를 추가한 박주민 의원안이 2022년 2월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지만 한 번도 검토되지 않았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직권남용죄가 정치보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부담감에 입법부 스스로 나서지 않은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법 공백을 해소하고, 법관에 대한 고소∙고발 남발을 막기 위해선 제한적 입법 추진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연구에선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지위를 이용한 행위'를 처벌 대상에 포함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익명을 요구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직권남용죄 개정은 현실과 이론의 괴리를 좁히기 위한 치열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