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승강장에서 나이 든 여성으로부터 “코트를 어디서 샀나”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이 유독 기억에 남은 건 “출구가 어디냐” 같은, ‘노인이 건넬 법한 물음’을 기대했던 어림짐작이 부끄러워졌던 탓이다. “옷이 예뻐서 비슷한 걸 꼭 사고 싶다”며 수줍게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앞으로, 또 평생을 나이 듦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겠다는 예감이 불현듯 들었다. 내게 말을 건 그 여성 역시 나이가 들어버린 모습으로 남들에게 비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현대문학 1월호에 실린 백수린의 소설 ‘눈이 내리네’에는 인간에게 끝내 불가해의 영역으로 남을 나이 듦을 사이에 둔 두 여성이 등장한다. 20대의 ‘윤지’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이모할머니’의 모과나무집에서 지낸다. 그는 이모할머니의 몸에서 끊임없이 새 나오는 온갖 소리에 놀란다. 기침과 코 푸는 소리, 트림, 방귀, 심지어 소변을 누는 소리까지. 이를 굳이 감추지 않는 이모할머니의 모습에 윤지는 ‘늙는다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윤지는 이모할머니의 행동을 '타인이 보는 나’를 끊임없이 신경 쓰며 사는 젊은 사람들에겐 주어지지 않는 특권이라 여기기도 한다. 소설 속 특권이란 단어의 쓰임새는 이처럼 미묘하다. 이모할머니는 글을 모르는데, 그건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끼니마다 아버지나 장남이 아닌 자신의 밥부터, 그것도 가장 뽀얀 흰쌀밥으로 퍼 주는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기에 그는 결혼 전까지 외출을 허락받지 못했다.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오빠들이나 동네 친구가 학교에 간 사이 홀로 집에 남아 소일거리를 하던 이모할머니의 유년기를 정말로 '특권'이라 부를 수 있나.
“삶 앞에 무궁무진하게 펼쳐져 있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그로 인해 커져가는 불안에 사로잡혀” 대학 생활과 젊음을 누리던 윤지 역시 나이가 든다. 소설에서 윤지의 나이가 20대, 30대, 40대, 서른다섯 등으로 언급되는 동안 이모할머니의 나이는 마지막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 건 노년을 바라보는 사회의 납작한 시선을 반영한다. 60대이든 70대이든 혹은 90대이든 관계없이 나이 든 여성은 그저 ‘할머니’일 뿐이다. 모든 욕망에 초연한 채로 “단조롭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노년의 일상”을 보낸다는 편견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노년의 일상과 생각을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글을 배우고, 암 수술 1년이 지난 시점에 자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깨관절 수술을 받는, 올해의 첫눈에 “눈이 내리네!”라고 외치는 이모할머니의 천진한 얼굴은 어린아이의 것과 다름없다. “언제 이렇게 늙어 버렸을까.”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이 물음은 노인의 삶을 지레짐작할 뿐인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라고 소설은 말한다. 어쩌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나이 듦에 대해 모를 것이다. 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