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을 남용하고 재판 독립을 침해한 혐의를 받은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의 정점.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렇지만 '무죄'의 뜻은 유죄 입증이 안 돼 형사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지, 아예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 이종민)도 일부 사건에서 "부적절한 재판 개입"이 있었다면서, 그 근거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있어서는 안 될 '재판 개입'이 존재했음에도 왜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일까. 한국일보는 30일 확보한 판결문을 통해 대법원 수뇌부의 재판 개입이 인정됐음에도 무죄가 선고됐던 세 가지 사건의 경과를 짚어봤다.
헌정 사상 최초로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섰던 '세기의 재판'답게, 이 판결의 선고 시간은 4시간 27분, 판결문 분량만 A4 용지로 3,160쪽에 달했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부적절했다"고 강조한 대표적인 판결 개입 사례는 2016년 11월 고 전 대법관의 ①'부산고법 판사 비위 은폐' 관련 사건이다. 2015년 초 법원행정처는 부산고법의 문모 판사가 지역 건설업자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인지했다. 2016년 11월 문 판사가 건설업자 관련 재판 내역을 외부에 전달한 것 같다는 의혹이 행정처에 전달됐다. 당시 부산고법에선 건설업자 관련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는데, 고 전 대법관은 부산고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소심 재판장에게 문 판사가 2017년 초 사표를 내니 그 이후에 선고를 해달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를 "부적절한 재판 개입을 요청한 행위"라고 판시했다. △유무죄뿐 아니라 재판 절차도 핵심 영역이라 재판부가 결정해야 하고 △절차 공정성도 재판 신뢰에 중요한 요소이며 △선고 연기 요청이 자칫 사건의 결과까지 재고하란 요청으로 오인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고 전 대법관은 무죄를 받았다. 이유는 재판부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에 깐깐한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직권남용죄 관련 일반적 쟁점에 대한 판단' 목차를 따로 만들어 60쪽을 할애했다. 관련 법리 설명 뒤 피고인들의 직무권한에 대한 판단을 내렸다. 긴 설명을 요약하자면 ①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서 ②직권을 남용해 ③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또는 ④다른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해야만 직권남용죄가 성립된다. ①부터 ③ 또는 ④까지 차례로 충족해야 한다.
부산고법 사건에서 재판부는 우선 고 전 대법관의 요청이 재판장에게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봤다. "재판 개입 시도가 요청에 그쳤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설령 재판장에게 전달됐다고 하더라도'라는 가정법을 쓰면서 한발 더 나아가 판단을 했다. △고 전 대법관에게 재판에 관여할 일반적 직무권한이 존재하지 않고 △재판장의 법과 양심에 따른 독립된 재판권 행사가 방해되지 않았으며 △재판부가 규정을 준수해서 재판 절차를 진행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고 봤다. 당시 재판장이 "내 책임하에 재판만 잘하면 돼 부담 느낀 바 없다"고 말했던 증언이 근거가 됐다. 이 사건만 봐도 법원이 직권남용죄의 요건을 얼마나 까다롭게 적용했는지 알 수 있다.
2016년 헌법재판소와 중복 심리하게 된 ②매립지 귀속 분쟁 관련 사건 중 일부를 조기 선고하라며 재판에 개입한 사건도 그렇다. 실제 실행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했지만, 재판부는 고 전 대법관이 보고를 받고 결정해 재판 개입에 가담했다고 봤다. 그러나 고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재판 개입과 재판연구관 사건의 심리 및 재판 조사·연구 업무에 대해 직무 권한이 없다고 봤다. 직권이 없으니 남용할 수도 없다는 논리다.
행정처가 ③2015년 한정위헌(헌법재판소가 법률 조항에 대한 법원 해석이 위헌이라 판단하는 것) 취지의 위헌제청 결정을 한 서울남부지법 재판부에 직권 취소 및 재결정 의견을 전달한 사건도 재판 개입으로 인정됐다. 이 전 상임위원의 부탁을 전달 받은 주심법관은 "사실상 결정된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며 동의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박병대 전 대법관은 이 전 상임위원이 개입하는 행위를 하도록 '결정했다'"고 판시했지만 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박 전 대법관이 직권 취소를 직접 지시한 게 아니라, 추가 검토를 취지로 '그냥 둔다'는 안을 포함한 보고서를 보고 받은 점에서다.
자연히 두 대법관의 상급자인 양 전 대법원장 역시 '범행 가담'이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문제의 세 사건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대체로 하급자의 조치가 취해진 뒤에 보고받았다고 판단하고, 가담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주심 대법관의 재판권과 대법원 연구관의 조사·연구 업무에 대해, 양 전 법원장에게 일반적 직무권한 자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더해졌다.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재판 개입이 실제 있었음에도 정작 사법행정권을 지휘·감독하는 대법원장이 무죄를 받았던 것은 이런 논리에 따라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