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학자인 김영나(73)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뼛속까지' 박물관인이다. 부친은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을 20년 넘게 지낸 고(故) 김재원 박사로, 최초의 부녀 박물관장의 역사를 썼다. 김 전 관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권력에 맞서 박물관을 지킨 에피소드로 잘 알려져 있다. 2016년 그는 박물관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상업적 전시를 원하는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경질됐다.
김 전 관장은 퇴임 후 미술사에 획을 긋는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2017년 '김영나의 서양미술사 100'(2017), 2020년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2020)에 이어 얼마 전 '한국의 미술들'(워크룸프레스 발행)을 냈다. 김 전 관장을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표지에 제 이름이 너무 크지 않나요?" 박물관계의 전설이자 원로인 그는 신간 표지를 앞에 두고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책의 부제는 '개항에서 해방까지'. 조선이 서구 국가들과 수교를 맺은 1880년대부터 1945년 광복 사이 격동기에 한국 미술이 걸은 길을 총망라했다. 서양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일본국제교류기금 펠로십(1990년)을 밟아 일본 연구자들과 교류한 김 전 관장은 왜 지금 '한국의 근대미술'을 집중 조명했을까.
"20세기는 모든 것이 섞이는 시대였어요. 한국 근대미술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은 유럽에서 배웠죠. 한국 미술의 위치나 성격을 알려면 일본, 유럽, 그리고 한국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해요."
김 전 관장은 한국 근대미술 개설서가 부족한 현실에 대한 아쉬움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 20~30년간 근대미술 연구는 회화뿐 아니라 삽화, 전시, 제도 등으로 확장됐고 지금도 주요 작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남아 있다. 세계미술사 속에서 한국 근대미술의 흐름을 짚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김 전 관장을 쓰도록 추동했다.
"근대성은 단순히 시기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의 표현이다." 책에서 근대를 표현한 구절이다. 역사를 단절된 구획이 아닌 흐름으로 인식하는 미술사가인 김 전 관장은 이전 시기와 분명히 구분되는 개념, 생활, 인물, 제도 등을 조명한다. 그간 근대미술은 회화, 조각을 중심으로 서술됐으나 그는 건축, 공예, 사진, 전시 등을 비중 있게 다룬다. 김 박사가 개인 소장해온 1937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기념회 총회 사진 등 그간 단행본에 실린 적 없는 귀한 도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김 전 관장은 해외 박물관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절감한다. 해외에서 전시를 하려고 해도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 드물어 적절한 큐레이터를 찾을 수 없다는 아우성이 퇴임한 그의 귀까지 들린단다. 케이팝 등 문화 영역에서 한국의 인기가 높은 지금이야말로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져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전시와 공연도 좋지만 일회성 행사는 그걸로 끝이에요.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하나의 학문으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대학과 대학원이 중요해요. 그래서 한국에서 실제 보고 경험하며 찾아낸 주요 자료를 기반으로 연구서를 쓴 거죠."
요즘 김 전 관장은 저서들을 영어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은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학술출판사인 브릴(Brill) 출판사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된다. 신간도 영어로 옮겨질 예정이다. "한국 미술에 관심을 갖는 해외 연구자들이 많아졌어요. 이들이 한국미술사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책이 필요해요. 영문판이 나오면 올해 10월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한국학 스터디그룹과 북토크를 하기 위해 뉴욕에 가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