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일에 간섭 말라'는 상식적 원칙만 지켜 달라"

입력
2024.01.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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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호프(Jeanne Hoff, 1938.10.16~ 2023.10.26)

‘가만한 당신’의 주인공으로 꼭 6년 전 스탠퍼드대 신경과학자 밴 바레스(Ben Varres, 1954~2017)를 소개한 바 있다. 기사는 과학자로서의 업적 못지 않게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FtoM)을 감행한 그의 용기와 과학계 성차별에 맞선 헌신에 주목했다. 2000년 ‘밴 바레스 :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조은영 옮김, 해나무)도 번역 출간됐다.
바레스가 호르몬 전환요법을 시작한 건 암으로 유방절제술을 받은 직후인 98년 초였고, 남성호르몬 치료는 여성암 재발 방지에도 유효했다. 치료에 앞서 바레스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편지를 썼다. “저에게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명예 일 친구 그리고 가족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는 숨을 수가 없다”며 ”비록 성별은 달라지더라도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신경교세포 연구의 선두주자 중 한 명으로 정년을 보장받은 대학 정교수였지만 그는 “내 경력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주일 내내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고 썼다.

바레스가 성정체성을 공개하기 꼭 20년 전인 1977년 12월, 뉴욕의 한 정신과 의사 유진 호프(Eugene Hoff)가 공영방송 WNBC-TV 토크쇼 ‘Not For Women Only’ 촬영팀을 자기 병원으로 초대했다. 젠더 이슈에 주목하던 프로그램이었다. 호프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로서 16개월 전 고환절제술을 받았고, 촬영 다음날 성확정수술(질 재건수술,vaginoplasty)을 받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송은 78년 6월 ‘Becoming Jeanne: A Search for Sexual Identity’란 제목으로 방영됐다. 방송에서 그는 결심의 순간을 두려움이 아닌 '고립감'으로 표현했다. “무척 외롭다. 내가 내 자신의 육체와 삶에 행하려는 일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오래 알고 지낸 이들조차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 한다는 걸 그들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같은 트랜스젠더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방송 출연 이유를 밝혔다. 또 “나는 의사에게 적절한 처치를 받기 위해 나는 대단히 힘든 길을 걸어왔고, 궁핍하던 시절부터 많은 돈을 써야 했다. 더 많은 의사들이 성전환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환자들을 포함한 성소수자들이 수치심을 떨치고 당당히 성정체성과 성지향을 공개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려면 자신이 먼저 실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도 말했다.

약 28분 분량의 방송은 인터뷰와 집도의의 수술 과정 설명, 몇 달 뒤 회복한 진이 다시 인터뷰어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섹스와 젠더, 성애(성지향) 등을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으로 구성됐다. 방송 끝 무렵 한 인터뷰어가 “우리가 어떻게 당신을 받아들여 주길 원하는가? 우리가 뭘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진은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남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상식적 원칙만 지킨다면 당신이 성전환자를 수용하는데 굳이 별다른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타인의 삶과 자유에 간섭하려면 당신은 매우 신중해야 하며,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또 그 간섭이 상대의 삶을 훨씬 나아지게 하리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이 괜찮지 않은 게 드러날 때까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우리도 그 신뢰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게이와 트랜스젠더 들이 손가락질 당하고 정신질환자로 감금까지 당하던 시절의 정신건강의학자로서, 자신들의 진실과 존엄을 위해 실존적 사회적 온 존재를 내던진 무명 활동가 진 호프(Jeanne Hoff, 1938.10.16~2023.10.26)가 파킨슨 병으로 별세했다. 항년 85세.



그는 1938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주류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해안경비대 출신 어머니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사생활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게 없지만, 80년대 그의 간호사였다가 평생 친구로 지낸 루카스(Ms. Lucas)란 이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집은 무척 궁핍했다고 한다. 루카스는 “호프가 혼자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너무 똑똑해서 부모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학생으로 워싱턴대를 60년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이학석사를 받은 뒤 63년 컬럼비아대 의대를 마쳤다. 따로 유니버시니칼리지런던(UCL)에서 고체화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워싱턴대로 복귀해 수련의-전공의 과정을 이수했다. 그가 언제 개인 병원을 열었는지도 알려진 바 없지만 독일 출신 내분비학자로 미국 트랜스젠더 의료 분야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해리 벤저민(Harry Benjamin, 1885~1986)과 협업했고, 76년 전공 분야도 다른 벤저민의 개인 병원을 인수해 정신의학과 병원으로 운영했다. 그가 원한 건 그 공간이 아니라 벤저민의 성소수자 환자들과 그들의 ‘데이터’였을 것이다.

최초의 성확정수술은 독일 성의학자 마그누스 허쉬펠트(Magnus Hirschfeld, 1868~1935)가 1907년 독일인 칼 “마사” 베어(Karl “Martha” Baer)에게 행한 남성화수술이라 알려져 있다. 여성(간성)으로 태어난 베어는 유부녀와의 불륜 사실이 발각돼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1922년 고환 절제술과 30년 음경절제술-질재건술을 받은 뒤, 나치에 의해 진료기록 일체와 목숨마저 잃은 루돌프 “도르첸” 리히터(일명 도라 리히터, Dora Richter), 덴마크인 트랜스젠더 여성 릴리 엘베(Lili Elbe)도 집도의는 달라도 모두 허쉬펠트의 환자였다. 허쉬펠트의 제자인 벤저민은 2차대전 이후 본격화한 호르몬요법의 선구자로, 1952년 미국인 최초로 덴마크에서 성확정수술을 받은 크리스틴 조르겐슨(Christine Jorgensen)의 미국 주치의이기도 했다. 벤저민은 66년 성전환의 의학적 사례 등을 소개한 책 ‘성전환 현상(The Transsexual Phenomenon)’을 출간했다. 그해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병원이 미국 최초 ‘성정체성클리닉’을 개설해 미국에서 처음 성확정수술을 시행했다. 벤저민의 책 제목처럼 당시 트랜스젠더는 화제의 ‘현상’이었고, 코미디언들은 트랜스젠더 코믹 연기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미국 정신의학회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은 74년 DSM-II에서 ‘동성애(homosexuality)’라는 단어를 없애고 ‘성적지향장애(sexual orientation disturbance)’라는 용어를 썼다. 52년 DSM-I의 사회병리적 성격장애(sociopathic personality disturbance) 범주에는 동성애가 아동성애(pedophilia)와 나란히 포함돼 있었다. 동성애는 1980년 DSM-III에서 ‘자아이완성동성애(ego-dystonic homosexuality)’, 즉 “이성애자가 되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이성애적 각성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원치 않은 동성애적 각성 등의 경험으로 이성애자가 되는 데 곤란을 겪는 증상”으로 재규정됐고, 새로운 진단 범주인 ‘정신적성적장애(psychosexual disorders) 항목에 성전환증(transsexualism) 등의 ‘젠더정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s)’가 동물성애 등 성도착증과 함께 기재됐다. 동성애 항목은 87년 DSM-III-R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성전환증은 94년 DSM-IV에서 아동기성정체성장애(childhood gender identity disorders)로 개칭됐다가 현행 버전인 2013년 DSM-5에서 ‘성적위화감(불편감, gender dysphoria)’이란 용어로 변경됐다.
다시 말해 트랜스젠더는 불과 10년 전에야 ‘장애’와 '정신질환'의 부당한 올가미에서 의학적으로 벗어났다. 성적위화감이란 트랜스젠더로서 유년기부터 겪을 수 있는 성기 및 2차 성징에 따른 자기 혐오감과 우울증, 가정과 사회에서 겪는 고립감과 차별, 그로 인한 공포와 절망감 등을 통칭하는 용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호프는 70년대 교회 성소수자모임 ‘디그니티(Dignity)’ 회원으로 활동하며 회원 청년들을 상담하고 격려했다. 저 모임의 뉴욕지부를 이끈 동성애자 사제 겸 인권운동가 버나드 린치(Bernard Lynch, 1947~) 신부는 “지금도 그렇지만 동성애(자) 혐오가 극심했던 당시 호프가 보여준 치열한 용기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는 아무 대가 없이 또 자신이 겪게 될 피해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존재로 삶으로써 우리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호프는 79년 벤저민이 설립한 ‘해리 벤저민 국제성별위화감협회’(HBDGDA)’ 창립멤버로서 당시부터 선구적으로 전문가들에게 성정체성과 성지향의 차이를 이해시키고자 애썼다. ‘트랜스젠더 건강을 위한 세계전문가협회(WPATH)’로 개칭된 그 단체는 의학계뿐 아니라 심리학 법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회원들로 구성돼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증거 기반 표준 치료법을 개발-개선해오고 있다.

호프는 80년대 병원을 팔고 여러 병원에서 월급 의사로 일하다 80년대 말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로 옮겨가 주립 교도소 수감자들을 상담했고, 99년 샌쿠엔틴 교도소에서 한 사형수의 공격을 받은 뒤 은퇴했다. 루카스는 “호프가 교도소 사건 트라우마를 잘 극복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가해자가 환자여서, 자기가 화를 내면 치료가 안 되기 때문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진료 기록과 문서, 서평, 편지, 에세이 등을 인디애나대 성-젠더 전문연구기관인 '킨제이연구소'에 기증했다.

존스홉킨스대 부교수 줄스 길피터슨(Jules Gill-Peterson)은 2018년 저서 ‘트랜스젠더 아동의 역사’를 쓰기 위해 킨제이연구소 자료를 검토하다 진 호프를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70년대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정신과 의사로 공개적으로 활동했다는 건 그 자체로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며 “당시 트랜스젠더들에겐 자기 사정을 이해해주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조류가 바뀌는 것 같은 엄청난 위안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2차성징을 겪던 미국 각지의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은 벤저민 등 극소수 우호적인 의사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호소하곤 했다고 한다. 호프가 기증한 밴저민의 자료에는 “너는 미성년자여서 진료를 할 수 없으니 만 21세(당시 성인 기준)가 된 뒤 찾아오라”는 내용의 답장 사본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도움을 받지 못한 이들 다수는 정신지체나 망상장애, 성적변태 등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 등에 수용되기도 했다. 15세 때부터 만 15년 간 갇혀 있던 한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가명 Donna)을 호프가 나서서 풀려나게 한 사실도 길피터슨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호프는 벤저민의 자료에서 도나의 사례를 확인한 뒤 "기존의 모든 진단-치료 보고서들이 현란한 용어들로 도나의 여성성 등에 대한 도덕적 비난만 일삼고 있을 뿐, 자료에 담겨 있는 명백한 근거들에도 불구하고 성전환증을 진단하거나 추정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고 병원 등 관계기관에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도나는 만 30세에야 정신병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부여된 성(assigned gender)이 스스로 느끼는 성(affirmed gender)과 일치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성별 위화감은, 약 3세 무렵부터 스스로 깨닫거나 부모 등에 의해 감지된다고 한다. 성기 등 몸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혐오감, 자신의 진짜 성을 찾고 싶은 욕구, 고립감과 절망감 은 2차성징이 시작되는 청소년기부터 더욱 심화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10대 청소년 약 3%가 트랜스젠더거나 논바이너리(Non-binary)다.
13~24세 성소수자 청소년 3만4,000명을 대상으로 한 2022년 조사에서는 미국 거의 모든 주 응답자의 50% 이상이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한 적이 있고, 주별로 14~20%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학협회와 정신의학회, 심리학회가 일제히 유해성을 강조해온 ‘성정체성 전환치료(conversion therapies)’라는 이중의 폭력을 겪은 응답자도 주별로 5~10%였고, 10~15%는 조사 당시 위협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트랜스젠더 성인 역시, 2023년 UCLA법대 윌리엄스연구소 조사 연구에 따르면, 약 42%가 자살을 시도했고 56%가 자해를 한 적이 있으며 81%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스젠더 성인이 자살을 고려한 경우보다 무려 7배나 높은 수치였다.
미국 정신의학계 특히 소아학계는 2010년대부터 성별위화감을 겪는 유-청소년에 대한 조기 사회적 전환(social transitions) 즉 가정을 비롯한 사회의 ‘사랑과 수용(love and acceptance)’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해왔다. 한국의 경우 2021년 서울대 의대 휴먼시스템의학과 윤현배 교수가 국내 최초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과목을 개설했고, 2020년 의료인단체인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가 출범했다.

미국인 중에는 평생 한 번도 바다를 못 본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호프가 나고 자란 미주리주는 지금도 정치·사회적으로 무척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히는 중서부 내륙이다. 50년 전 그는 세상을 항해 “남 일에 간섭(만) 말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어쩌면 당시에도 그걸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특히 유-청소년에겐 더 세심하고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알아듣지 못할 세상이어서 심중에 남겨야 했던 말들 때문에도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