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작은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분들이 쓸 카피나 슬로건을 부탁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책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다가 수강생들이 낼 책의 제목이나 부제로 내가 낸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질 때의 쾌감도 보통이 아니다. 나는 광고대행사와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받았던 불합리한 경험과 경쟁 스트레스 때문에 그 직업을 몹시도 싫어했는데 결국은 그 과정에서 익힌 짧고 함축적인 문장 쓰기와 친절한 글쓰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니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진주문고 여태훈 대표가 전화를 했다. 수십 년째 운영하고 있는 진주문고 외에 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악양 평사리에 '하동책방'이라는 작은 서점을 내기로 했는데 책방 오픈에 맞춘 슬로건을 써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책, 서점, 하동, 평사리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동네책방이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뒤지지 않는 명쾌한 한 줄'이 있었으면 하는 주문이었다.
다른 급한 원고가 있었지만 이 일을 뒤로 미뤄두고 싶지 않았다. 바로 책상에 앉아 아이데이션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이 지역과 인연이 깊은 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경구였다. 나는 이걸 살짝 비틀어 슬로건으로 만들었다. '책, 햇볕에 펼치면 지식이 되고 달빛이 물들면 문화가 된다'. 그럴듯했다. 두 번째는 책이 주는 지식으로서의 효용이었다. 헤겔이 언급한 미네르바의 부엉이 생각이 났다. 지성과 지혜의 상징인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하동에 왔다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말 그대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평사리에 왔다'라고 썼다. 하다 보니 점점 신이 났다.
세 번째는 여태훈 대표가 예전에 '서점에서 책만 파는 건 하수다. 사람과 문화를 팔아야 한다'라고 했던 말이 힌트였다. '책은 덤이고 문화가 본심입니다'라는 슬로건은 적당히 건방지면서도 진심이 담겨 있어 보였다.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몰아쳐 내리 일곱 개를 쓰고 각각 설명을 붙여 여 대표에게 보냈더니 깜짝 놀랐다는 답변이 왔다. 어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슬로건을 썼냐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지만, 생각해 보니 어떤 브랜드에 내 생각이나 좋아하는 스토리를 담는 순수한 기쁨에 힘든 줄 모르고 집중했던 것 같다.
여 대표는 며칠 후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어서 걱정'이라는 칭찬과 더불어 내가 쓴 슬로건들이 들어간 플래카드 사진을 보내왔다. 다른 일도 아니고 문화 사업인 동네책방 오픈에 나도 작은 기여를 한 것이라 기뻤다. 다만 일곱 개 슬로건 중 아내와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했던 건 '불 꺼진 지리산 자락에 지혜의 등불 하나 켜다'였는데 그게 빠진 걸 보고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다 다르다는 걸 느꼈다.
어떤 사업이나 브랜드에 자기 생각을 싣는 건 신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걸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평소 책을 많이 읽고 메모를 하세요"라고 하면 얄미운 대답이 될 것 같아 살짝 힌트를 드리겠다. 브랜딩이나 마케팅에 관련된 책만 읽지 말고 할리우드 시나리오 닥터 로버트 맥기나 리사 크론 같은 컨설턴트의 책을 읽어 보시라. 모든 책은 읽으면 보물단지이고, 안 읽으면 그냥 책이다. 사실은 모든 책이 그렇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