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 학원에서 16년 동안 영어 강사로 근무한 이성미(55ㆍ가명)씨. 그녀는 정년을 맞아 학원 측에 퇴직금을 요청했다.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학원 측은 △그녀의 주당 근무 시간은 15시간 미만이었고 △계약 기간이 각각 1년 미만이라는 기술적인 이유로 퇴직금 지급을 거절했다. 실제로 이씨는 ‘6개월마다 재계약’하는 형식으로, 16년 동안 한 학원에서 근무했다.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노동청도 학원의 입장을 지지하며 진정을 기각했다. 이씨의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결국 이씨는 필자를 찾아왔다. 계약서를 면밀히 검토해보니, 이씨의 진술 내용과 계약서의 내용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계약서에는 강의 시간이 주당 14시간으로 명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수업 준비·학생 상담·행정 업무 등 추가 업무 때문에 매주 30시간이 넘게 근무했다고 한다. 계약서에 기재된 근무시간과 실제 근무시간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근로자는 퇴직할 때 퇴직금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다. 회사가 퇴직금 지급을 거부할 경우, 지방고용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하는 것이 가장 신속한 해결 방안이다. 노동청은 △진정인이 독립사업자가 아닌 근로자인지 △근무 기간이 1년을 넘었는지 △주당 15시간 이상 근무했는지 등 세 가지 요건을 심사한다. 노동청은 근로자의 진정이 위 요건들을 충족한다고 판단하면 회사에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린다. 회사가 이 명령을 준수하면 해당 사안은 해결된다. 회사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대표이사는 법적인 조치를 받게 되고 수사도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근로자는 퇴직금을 받기 위한 별도의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또한 근로자는 근로복지공단에 대지급금을 신청해 미지급 퇴직금 중 최대 1,000만 원까지 미리 지급받을 수 있다.
언뜻 퇴직금 수령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성미씨 같은 중년 근로자가 유독 퇴직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하다. 아직 단시간 근로자나 플랫폼 노동 종사자에 대한 퇴직금 보호가 미비한데, 이들 업종에 중년층이 많이 근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취업자의 3분의 1이 단시간(주 36시간 미만) 근로자인데, 단시간 근로자의 60%가 중년과 노년층이다. 향후 이 비중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초고령 사회가 되면서 중년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교육ㆍ복지ㆍ공공 부문에서의 일자리가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계약서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실제 근로 환경이 계약서와 달랐다면, 이를 증명할 증거를 제시해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이씨의 경우가 이에 해당했다. 강의 시간은 주당 14시간에 불과했으나 강의 준비와 기타 업무에 소요된 시간을 포함하여 주당 42시간의 근로를 인정받았다. 또한 그녀는 매 학기마다 계약을 반복해서 체결했음을 입증했고, 결국 ‘16년 근무’에 대한 퇴직금 전액을 수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년 근로자들이 당면한 문제는 단순히 퇴직금 수령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연금 수령 시기가 점차 늦춰지는 가운데, △임금 피크제 이후의 소득 감소와 △퇴직 직후 ‘소득 0원’은 상당한 불안 요소다. 그래서 중년 근로자들은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퇴직연금의 유형과 적립금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퇴직연금은 크게 회사가 관리해주는 확정급여형(DB), 다른 하나는 개인이 직접 관리하는 확정기여형(DC)으로 분류된다. 금융감독원의 '통합연금포털'을 통해 가입한 퇴직연금을 확인하고 재조정할 수 있다. 임금상승률이 높고 투자 안정성을 중시한다면 DB형이 적합하고, 임금상승률이 낮고 투자 수익성이 중요하다면 DC형이 유리하다. 또한 임금 피크제 적용을 받기 전에 DB형에서 DC으로 전환하는 등의 결정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1월 15일 자 중·꺾·마 ‘100세 시대 노후 대비, 집 한 채론 불가능...’ 참조)
퇴직금은 단순한 법률적 권리를 넘어서, 중년 근로자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개인의 상황에 잘 맞는 퇴직금 관리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근로자의 권리인 퇴직금을 정당하게 지급받고 잘 활용하기 위한 여러분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