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남북관계의 틀을 뜯어고치겠다는 심중을 내비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5년 평양 표준시를 제정했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북한의 속내는 통일보다는 개별 국가로서의 남북한 공존에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2019년 김정은이 금강산을 찾아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했을 때부터, 김정일 당시의 남북 교류협력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듬해 북한은 대북 전단을 문제 삼아 개성 연락사무소를 폭파해 버렸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움직임 속에서도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통일문제의 원칙만큼은 유지해왔다. 2017년 5월, 김정은 시대 들어 처음으로 개최한 노동당 대회에서는 조국통일 3대 원칙과 연방제 통일을 다시 강조했다. 4년 후 노동당 8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는 "통일이라는 꿈은 더 아득히 멀어졌다"는 김정은의 발언이 등장하지만, 이는 '강력한 국방력만이 조국통일 위업 달성의 수단'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프롤로그에 불과했다.
북한이 8차 당대회에서 조선노동당 규약을 개정한 데 대해 일부에서 기존의 적화통일론을 포기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자, 아예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반박에 나서기도 했다. 김정은이 들고나온 우리국가제일주의에 대해 '민족 중시'에서 '국가 중시' 노선으로의 전환이라고 지적한 우리 전문가들의 해석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강국 건설 과정이 민족 문제 해결 투쟁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지금?'이다. 북한은 왜 지금 자신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주장해왔던 '우리민족끼리' 주장을 내팽개쳤으며 왜 지금 대남사업 기구들을 서둘러 없애버렸을까. 우선, 대외적 요인을 보자. 북한은 무엇보다도 자신들 스스로 일찌감치 신냉전이라고 못 박아 버린 국제질서에 편승해 독자적인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겠다는 전략노선을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 중인 러시아의 부족한 무기고를 채워주는 조건으로 김정은은 푸틴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미사일 기술을 넘겨받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행세하고 있는데도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는 무력화되고 있다. 자신들의 '국격과 지위'를 거론하며 '식민지 졸개들과 통일문제를 논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배짱을 부리는 데는 최근 들어 중국과 러시아가 보여준 유무형의 냉전외교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내적으로는 김정은 체제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남한풍(南韓風) 차단을 위한 대남 적개심 확대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은 2020년 적대국의 영화와 드라마를 유포할 경우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희대의 사상통제법을 제정했다. 반동문화사상배격법 시행과정에서 자신들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대세력과 '우리민족끼리' 운운한다는 것이 북한의 MZ세대들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북한의 통일노선 전환을 불가피한 조치로 볼 것이냐, 공세적 조치로 볼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대응전략도 달라질 수 있다. 김정은의 통일노선 전환에서는 불가피한 상황 전개를 공격의 소재로 반전시켜 활용하는 북한식 대외전략의 패턴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