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수뇌부(대법원장, 대법관 등)가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했다는 의혹.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의 정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1심 재판이 4년 11개월간의 대장정 끝에 26일 마무리됐다. 의혹이 처음 제기된 지 7년 만에 나온 법원의 첫 결론은 전부 무죄. 당시 양 대법원장의 행위 중에 법을 위반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사건 시작은 7년 전인 2017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양 전 대법원장이 현직일 때다. 판사였던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발령받은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 배경에 양 전 대법원장에게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견제하란 지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대법원이 특정 판사 동향을 파악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논란은 확산됐다.
양 전 대법원장 재직 당시 대법원은 자체 조사를 거쳐 이 의혹을 "사실 무근"으로 결론 냈지만, 같은 해 9월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취임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이듬해 6월 김 전 대법원장은 "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발표하며, 검찰 수사에 길을 열어줬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지휘를 했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당시 3차장검사로 사법농단 수사팀장을 맡았다.
수사가 시작된 지 약 8개월 만인 2019년 2월 11일, 결국 의혹의 정점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전직 대법원장의 구속기소는 긴 드라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기소 이후 1심 선고까지 무려 1,811일, 약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검찰과 다투면서, 재판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범죄사실만 47개, 검찰 공소장은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인 296쪽에 달했다. 검찰이 신청한 증인만 211명이다. 공판준비기일을 포함해 재판은 290차례나 열렸고, 그사이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부 직권으로 보석 석방됐다.
2019년 12월엔 양 전 대법원장이 폐암 수술을 받으며, 재판이 두 달가량 중단됐고, 2021년 초엔 법원 인사이동으로 재판부 구성원 3명(재판장, 배석판사 2명)이 모두 바뀌기도 했다. 통상 기록만 확인하거나 당사자들이 동의하면 공판 갱신 절차를 생략할 수 있지만, 양 전 대법원장 등은 형사소송법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7개월 동안 재판정에선 과거 증인신문 녹음파일만 재생됐다. 일각에선 방어권 행사를 빌미로 법을 잘 아는 전직 법관들이 의도적으로 재판 지연 전략을 쓰는 것이란 비판이 나왔다.
법원장, 법원행정처 차장,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거쳐 대법원장에까지 올랐던 초엘리트 법관 양승태는 만 76세 생일을 맞은 26일 후배 법관들 앞에 서서 '선고'를 받았다. 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등 여러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적은 있지만, 전직 사법부 수장이 영어의 몸이 된 것은 양 전 대법원장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의 사법처리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고, 그의 재판은 여러 의미에서 '역대급'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