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 '압박 카드'라도 꺼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이 친(親)이스라엘 진영인 서방에서 깊어지고 있다. 2만5,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숨지고 갈수록 인도주의 위기가 심화하는 가자지구 전쟁을 끝내라는 국제사회 요구를 줄곧 외면해 온 이스라엘이 '강경 모드'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주권을 인정하는 '두 국가 해법'에도 거듭 반대 입장만 밝히는 등 한발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21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유럽 전문 언론 유로뉴스 등을 종합하면, 다음 날 열리는 유럽연합(EU) 외교장관 회의 안건에는 'EU 차원의 중동 평화 계획 수립'이 올랐다. 이와 관련, EU가 사전에 마련한 문서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의 완전한 상호 외교적 인정" "독립 팔레스타인" 등 표현이 담겼다. 두 국가 해법을 기반으로 평화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뜻이다.
두 국가 해법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 국경선을 기준으로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자는 내용이다. EU와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오랫동안 지지해 온 노선이기도 하다. 하지만 EU의 이번 평화 계획은 단순한 원론 차원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중동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를 이스라엘이 최근 들어 더욱 거세게 부정하고 있는 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많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최근 두 국가 해법을 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도 사실상의 공개 설전을 벌였다.
EU 내에선 두 국가 해법 관철을 위해 '이스라엘에 제재를 가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EU가 이스라엘에 제공하는 무역 및 투자 혜택을 줄이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스라엘의 '마이 웨이'에 대한 개별 국가·국제기구의 비판 수위도 높아졌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1일 "이스라엘의 두 국가 해법 수용 거부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랜트 섑스 영국 국방장관도 "네타냐후 총리는 중동 평화의 유일한 해결책인 두 국가 해법을 반대하는 데 정치 인생 대부분을 썼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다만 미국, EU 등의 싸늘한 태도가 이스라엘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미지수다. 네타냐후 정권이 전쟁을 무리하게 이어가는 건 '네타냐후 퇴진론' 등 내부 갈등을 잠재우려는 목적으로 보이는 만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세는 한동안 계속될 공산이 크다. 우방국임을 공언해 온 상황에서 이스라엘에 실질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제재를 내놓기도 힘든 노릇이다. EU만 놓고 보면, '가자지구 전쟁 즉각 종료'를 둘러싼 회원국들 간 이견 탓에 대응 방안 합의 자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 분노와 우려에도 아랑곳없이 군사력 과시에 몰두하고 있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21일 "이스라엘방위군은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의 지상 공격을 더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상 개전 후 가자지구 내 사망자는 이날로 2만5,000명을 넘어섰다.
하마스에 의해 여전히 억류돼 있는 130명가량의 인질을 구출할 가능성도 희박해지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21일 "하마스가 인질 석방 협상 조건으로 사실상의 항복을 요구했는데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항복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헛수고를 한 게 된다"고 말했다. 미국은 휴전을 위해선 인질 구출 성과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브렛 맥거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중동 담당 조정관을 이스라엘·하마스 중재국인 이집트·카타르에 급파했다고 미국 악시오스가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