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의 한 세븐일레븐 편의점 라면 코너 두 번째 칸 매대가 텅 비어 있었다. 신라면 사발면이 있던 자리다. 라면 코너 다섯 칸을 신라면과 일본 회사인 도요스이산 및 닛신의 제품들, 삼양식품이 만들어 미국 유통사 UEC에 자체 브랜드(PB) 제품으로 공급하는 히스패닉 타깃 라면 타파티오가 채우고 있었다. 신라면은 제일 눈에 잘 띄는 두 번째 칸 전체와 첫 번째 칸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19일 오후 온타리오의 코스트코 비즈니스 센터. 자영업자 등을 대상으로 코스트코 일반 매장보다 대용량 식품들을 더 저렴하게 판매하는 이곳에서 만난 농심 라면만 신라면(봉지·용기), 신라면 블랙, 생생우동, 돈코츠라면, 육개장 사발면, 김치 사발면, 신라면 골드 등 일곱 가지였다. 이 중 돈코츠라면은 코스트코의 의뢰를 받아 납품하는 PB 제품이었고 신라면 골드는 닭 육수 맛이 인기인 트렌드에 따라 지난해 10월부터 판매한 신제품이다. 생생우동은 미국에서 유일하게 수분이 함유된 면을 인스턴트 식품으로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전량 한국에서 들여온다.
농심 라면은 일본 라면보다 양도 많고 가격도 비쌌다. 코스트코 비즈니스 센터 라면 코너에 나란히 놓인 신라면(봉지)과 닛신 탑라면(봉지)을 비교해 봤다. 4.2온즈(약 119g)짜리 신라면은 18개들이 15.49달러로 개당 약 0.86달러였다. 3온즈(약 85g)짜리 48개들이가 13.79달러로 개당 약 0.29달러인 탑라면과 가격이 세 배가량 차이 났다. 농심 아메리카 관계자는 "코스트코에서 파는 라면의 절반이 농심 제품"이라며 "일본 라면이 간단한 구성으로 식사 사이 먹는 스낵으로 통한다면 농심 라면은 건더기가 많고 양도 많아 한 끼가 가능한 식사로 통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캘리포니아주 랜초쿠카몽가의 농심 2공장. 생산 라인에 들어서니 밀가루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거대한 기계에서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사발면에 들어가는 동그란 모양과 봉지에 들어가는 사각형으로 밀가루를 성형해 뜨거운 기름에 튀겨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다음 공정을 향해 이동하는 갓 만든 라면은 고소한 맛이 났다. 여기에 1공장에서 만든 스프를 넣어 봉지면과 사발면으로 포장한다. 이 날은 3개 라인에서 신라면 2종(봉지, 사발면)과 육개장 사발면을 생산 중이었다. 너구리도 여기서 만든다.
1공장 바로 길 건너에 세워진 2공장은 2022년 4월 가동을 시작했다. 2010년대 이후 농심 미국 법인이 매년 10% 넘는 성장률을 보이고 2020년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K컬처 붐으로 한국 라면 수요가 폭증한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라 간편한 집밥으로서 라면의 인기는 더 올랐다. 2021년에는 한국 공장에서 만든 라면을 급히 받아 미국에서 팔 정도였다. 회사 측이 현지 생산량을 늘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원래 창고로 쓰던 곳에 새 공장을 지은 것.
2공장에서는 연간 3억5,000만 개의 라면을 만들 수 있다. 3개의 라인에서 1분에 라면 1,100개를 생산해 6개의 라인에서 1분당 1,500개의 라면을 생산하는 1공장보다 속도가 빠르다. 공장 관계자는 "2공장은 소품종 대량 생산에 특화됐고 1공장은 여러 품종을 생산한다"며 "조만간 라인 하나를 더 추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1, 2공장 가동률은 70% 정도로 농심은 이르면 2025년 미국에 세 번째 공장을 짓기 시작할 예정이다.
지난해 미국 법인의 신라면 매출이 전년 대비 19% 성장한 데도 2공장의 힘이 컸다. 2공장의 생산역량을 기반으로 월마트와 코스트코 등 유통 판로를 확대하면서 매출이 늘었기 때문. 농심은 미국 매출의 성장에 힘입어 지난해 신라면 국내외 매출액이 역대 최대치(1조 2,100억 원)를 기록하기도 했다.
농심 라면은 2000년대 초반 미국 유통 채널에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인지도를 높인 건 2010년대다. 한인 시장 인근 아시안 마트, 매운맛을 즐기는 히스패닉을 대상으로 팔리다 2017년 신라면이 월마트의 미국 4,692개 전 점포에 등장한 뒤 코스트코, 샘스클럽 등 핵심 유통 채널에도 진출했다. 2018년부터는 현지 유통점 매출이 아시안 마켓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농심은 처음부터 일본 라면과는 다른 프리미엄 라면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용훈 농심 아메리카 상무는 "1970년대부터 일본 라면 회사들이 미국에서 라면을 저가 식품으로 키워왔기 때문에 후발 주자인 농심이 저렴한 상품을 내면 공급량을 앞세운 일본 회사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12년 미국에서 첫선을 보인 신라면 블랙은 농심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확실하게 다진 상품이다. 당시 '강남스타일'로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가수 싸이를 신라면 광고의 모델로 내세웠다. 2020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가장 맛있는 라면' 1위에 오를 정도로 신라면 블랙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설렁탕 후첨 양념이 들어간 진한 소고기 육수의 크리미한 맛이 적절한 매콤함과 조화가 된 점, 풍성한 건더기 등이 좋은 점수를 땄다. 현재 월마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농심 라면도 신라면, 신라면 블랙, 신라면 골드 순이다.
미국 시장에서 농심의 과제는 소비자에게 쉬운 레시피로 본래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 상무는 "한국 소비자는 감으로 물 양을 조절하고 스스로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어 짜파구리를 만들지만 미국 소비자는 물 조절도 어려워하기 때문에 레시피가 무조건 쉬워야 한다"며 "같은 라면이라도 한국과 미국의 라면 레시피가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의 신라면을 끓일 때는 550ml의 물 양이 적절하지만 미국 신라면은 500ml로 안내한다. 미국의 생수통 하나의 용량이 500ml이기 때문에 이에 맞춘 것이다. 짜파게티도 한국 레시피는 끓인 후 물을 일부 버리도록 하지만 미국 짜파게티 레시피는 처음부터 물을 적게 넣고 끓여 물을 버릴 필요가 없게 알려준다. 라면 용기면에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빨리 완성하는 것도 미국에서 시작됐다.
농심이 '모디슈머'1 제품으로 내놓은 짜파구리도 미국에서 먼저 나왔다. 짜파구리가 등장한 영화 기생충이 미국에서 크게 주목을 받자 영화를 보고 짜파구리가 궁금하지만 만들기 어려워할 소비자를 위해 농심 아메리카에서 아예 제품으로 만들어 코스트코에서 판매했다.
농심 미국 법인은 올해 라틴 시장도 공략한다. 라틴계 소비자가 좋아할 만한 신제품을 앞세워 라틴계 소비자 비중이 높은 텍사스,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이 상무는 "미국에서 라면은 도입기에서 성장기로 넘어가는 중이라 소비자들이 익숙해지는 훈련이 더 필요한 식품"이라며 "이제 신라면은 미국 가정이 주방 팬트리에 쌓아두고 먹을 정도로 보편적"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