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제과류 도매거리’로 유명한 베트남 하노이시 외곽 호아이득군의 한 골목. 다음 달 베트남 최대 명절 뗏(음력설·8~14일)을 한 달 앞두고 가게 입구마다 외국 유명 브랜드 과자와 초콜릿, 맥주, 청량음료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300m 남짓한 골목에는 트럭과 삼륜차 수십 대가 오가며 창고 속 물품을 쉴 새 없이 실어 날랐다.
베트남 제사상에도 오를 정도로 인기가 많은 한국의 초코파이 역시 이곳의 인기 상품 중 하나다. 그런데 매장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뭔가 이상했다. 제품명 영어 철자가 정식 명칭인 ‘Choco-Pie’가 아닌 ‘초카파이(Choca-Pai)’로 적혀 있었다. 초코파이를 베낀 짝퉁(가짜 상품) 과자다. 붉은색인 상자 색상과 디자인 등이 초코파이와 비슷해 얼핏 정식 제품으로 착각할 정도다. 가격은 상자당 1만4,000동(약 770원). 일반 매장에서 파는 초코파이 가격이 5만~6만 동(약 2,700~3,200원)인 점을 감안하면 4분의 1 수준이다.
해당 거리를 잘 아는 관계자는 한국일보에 “중국에서 수입한 가짜 상품과 이 지역에서 자체 생산한 모조 제과 제품이 혼재돼 있다”며 “지식재산권(IP) 문제를 피하기 위해 상점들이 일부러 한국 기업 오리온(Orion)을 오레온(Oreon)으로, 초코파이를 추코파이(Chooco-Pie)나 초쿠파이(Chocoo-Pie) 등으로 철자 한두 개만 바꾸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곳을 출발한 ‘짝퉁 과자’는 트럭에 실려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방 농촌, 산간마을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오리지널 제품에 익숙하지 않거나 평소 유심히 살피지 않았던 이들은 진품으로 착각하고 구매·섭취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초코파이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건강기능식품에 이르기까지 한국 제품 위조·모방품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지식재산보호원에 따르면 2017~22년 국가별 한국 브랜드 모방 의심 사례는 중국 1만2,692건, 태국 2,039건, 인도네시아 1,964건, 베트남 1,730건에 달했다. 여전히 중국이 압도적으로 많긴 하지만, 동남아가 빠르게 그 뒤를 추격하고 있다.
한국 제품이 주요 타깃이 된 건 K팝, 드라마, 영화 등 ‘K컬처 붐’으로 한국산 제품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기 때문이다. 베트남 대학생 투안(22)은 “한국 드라마에서 본 화장품이나 음식을 주로 구매한다”며 “K라벨이 붙으면 기본적으로 품질 관리가 될 것으로 생각해 믿고 사는 편”이라고 말했다.
정체불명의 가짜 제품들은 이런 한국의 프리미엄 이미지에 편승한다. 한국 기업 이름이나 브랜드 로고를 그대로 베끼거나, 기존 상품과 거의 유사하게 만든 뒤 업체명을 조금 변형해 소비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등 방법도 다양하다.
위·모조품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면서 한국 업체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쿠쿠전자의 대표 가전상품인 전기밥솥 역시 동남아 시장에서 짝퉁의 습격을 피하지 못했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 밥솥으로 지은 밥이 밥맛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국산 밥솥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위조품도 덩달아 늘어났다.
일부 제품은 쿠쿠(CUCKOO) 영문 표기 가운데 알파벳 C를 G로 바꿔 ‘국쿠(GUGKOO)’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일부 매장에서는 아예 정품 로고를 그대로 갖다 쓴 제품도 찾아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인증 절차도 거치지 않은 조악한 제품이지만, 시장에서는 온라인에서만 최소 월 2,000개 이상의 ‘짝퉁 쿠쿠밥솥’이 팔리는 것으로 추산한다. "베트남 소비자 상당수가 가품인지 모른 채 지갑을 열지만 싼 가격 때문에 알면서도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쿠쿠 관계자는 “브랜드 상표권은 회사가 장기간에 걸쳐 이뤄온 상품에 대한 연구, 개발 노력과 그간 쌓아온 평판, 명성이 고스란히 담긴 기업의 주요 자산”이라며 “지식재산권은 물론 쿠쿠 브랜드를 구매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권리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남아시아가 한국 농산물의 새로운 수출처로 부상하면서 정체불명의 과일이 한국산으로 둔갑해 팔리기도 한다. 지난해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중국산 배를 한국산으로 속여 팔던 과일 소매업체들이 적발됐다. 상자 겉면에 한국어로 큼지막하게 ‘신고(품종)’ ‘배(상품명)’라고 표시됐지만, 원산지란에는 작은 글씨로 중국산(made in China)이 적혀있었다.
한국산 과일이 중국산에 비해 가격과 품질이 높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상자 표기를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중국산 배를 한국산으로 오인하고 비싼 값에 구매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태국에서도 중국산 감과 배가 마치 한국산인 것처럼 포장돼 유통됐다. 태국 최대 농수산물 도매시장 딸랏타이에서 발견된 감 상자 측면에는 한글로 ‘달콤한 감’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박스 위 ‘달콤한 코카 영양이 풍부하다’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적혀있지만, 한국어를 잘 모른다면 한국 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원산지 표시 위반 등으로 단속하거나 처벌하기 쉽지 않다. 박스 한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중국산’이라고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엄밀히 말하면 원산지 표기를 속인 게 아니기 때문에 단속 근거가 없다는 게 동남아 현지 당국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특히 동남아 상품 유통·거래 채널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전자상거래가 활성화하면서 위조품은 더욱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아마존'으로 불리는 현지 최대 e커머스 플랫폼 쇼피의 2022년 한국산 짝퉁 상품 피해 추정액(거래액)은 4,011억 원 선이었지만, 지난해 1~7월에는 4조4,043억 원으로 10배 이상 폭증했다. 같은 기간 또 다른 동남아 주요 플랫폼 라자다를 통한 피해액도 5,095억 원으로 추정됐다.
동남아에서 횡행하는 가짜 한국산 제품은 '신뢰' 문제로 이어진다. 품질에 문제가 생길 경우 발생 가능한 소비자 분쟁으로 국내 기업이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짝퉁' 제품의 위생, 안전 문제가 한국 제품에 대한 신뢰도나 국가브랜드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정부는 피해를 막기 위해 대응에 나서고 있다. 현지 짝퉁 제조·판매 업체를 직접 단속할 권한은 없지만 △현지 당국에 시장 모니터링과 단속을 요청하거나 △해외 진출 한국 업체의 브랜드 지식재산권 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법률 자문을 제공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등 재외공관은 현지 언론 매체 및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주재국 '인플루언서(온라인상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 등과 협력해 한국산 농산물 구별법 등도 적극 알리고 있다. 기업들도 피해를 막기 위해 상품에 위조 방지 스티커, 홀로그램, 큐알(QR)코드 등 각종 식별마크를 부착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코트라)는 동남아 지역에서 지식재산권 세미나와 위조상품 식별 행사 등을 열며 위·모조 상품 위험성을 한국 기업과 현지 정부에 알리고 있다. 올해부터는 업무가 지식재산보호원으로 이관된다. 조은진 코트라 베트남 하노이무역관 부관장은 “한국 기업이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기 전 현지에 상표권 등록을 먼저 하는 등 철저한 준비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