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때문에 싸우던 한국인... 이젠 '가치' 놓고 더 갈등한다 [2023 공공갈등 의식조사]

입력
2024.01.18 10:00
10면
[갈등해소센터·한국리서치 1000명 조사]
"남녀 갈등 심각" 10년 새 29.0→53.1%
서울-지방, 세대 간 갈등은 갈수록 심각
빈부·노사·비정규직 갈등은 다소 완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갈등 요소 중에서, 지난 10년 동안 남성과 여성 사이 젠더갈등이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증폭됐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민들은 △소득·자산 관련 갈등 △노사 갈등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 등은 다소 완화됐다고 평가했지만, △이념갈등 △세대갈등 △서울-지방 갈등은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와 한국리서치가 전국 1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7일 발표한 '2023 한국인의 공공갈등 의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89.8%는 "우리 사회의 집단 간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조사가 시작된 2013년 이후 이 응답률은 줄곧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을 오갔는데, 이번에도 종합적 갈등 인식은 예년과 큰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갈등 요소별로 지난 10년간의 응답률을 비교해 보면 상당한 변화가 감지된다. 14개 갈등 유형별로 심각성 인지율을 평가해 보니 "진보와 보수세력 간 갈등(이념갈등)이 심각하다"는 응답이 86.6%로 가장 높았다. 이념 대립은 2019년 빈부갈등을 제치고 가장 심각한 갈등 유형으로 부상한 이후, 줄곧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2013년 86.1%의 응답률을 보였던 빈부갈등은 이번 조사에서 77.9%로 하락했다. 경영자와 노동자의 갈등 역시 같은 기간 84.1%에서 77.0%로 눈에 띄게 하락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84.2→73.9%), 중앙정부와 지방정부(53.3→46.3%) 간의 갈등 심각성 인식도 역시 10년 사이 하락했다.

14개 갈등 유형 중 가장 심각성이 크게 증가한 부문은 바로 젠더갈등이다. 2013년 29.0%에 불과했던 남녀 갈등의 심각성 인식률은 이번 조사에서 10년 만에 53.1%로 뛰어,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10년 전 조사에선 14개 유형 중 가장 갈등 정도가 낮았지만, 이번 조사에선 9번째 갈등 요소로 뛰어올랐다. 젠더갈등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던 2016년부터 눈에 띄게 증가하더니,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시작된 2018년, 'n번방 사건'이 터진 2020년에 변곡점을 맞이했다. 청년과 노인의 세대 갈등(61.1→71.8%)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영남과 호남으로 갈라졌던 지역 갈등은 '수도권 대 지방의 갈등' 구도로 재편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첫 조사에서 영·호남(51.9%)은 수도권·지방(50.2%)보다 갈등의 정도가 더 심각했지만, 이번 조사에선 수도권·지방(65.3%)이 영·호남(58.7%)을 크게 앞섰다. 하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폭등, 서울 중심의 국토 불균형 발전에 대한 소외 여론 등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이강원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 소장은 "지나치게 과잉된 이념 갈등이 여전히 큰 가운데 남녀 갈등이나 수도권·지방 갈등에도 적신호가 켜졌다"며 "최근 김포시의 서울 편입 논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이를 방증한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들은 "언론 공정성 확보가 시급하다"는 해법(84.1%)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새판'을 짜야 한다는 열망도 높게 감지됐다. 양당제를 부추기는 소선거구제를 겨냥해 "선거제 개편이 시급하다"는 응답도 80.4%나 됐고, "1987년 이후 지속된 5년 단임 대통령제 등 헌법 개정에 찬성한다"는 응답자도 62.3%에 달했다.

어떻게 조사했나
한국사회갈등해소센터와 한국리서치는 공공갈등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정기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2013년부터 매년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지난달 28~이달 3일까지 전국 성인(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11월 주민등록 인구 현황에 따라 성별·연령별·지역별로 비례할당한 뒤 한국리서치 응답자 풀에서 무작위로 추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이승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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