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신(神)을 믿었던 흔적이 남은, 가장 오래된 유적은 어느 곳일까?
인류가 죽은 사람을 묻기 시작한 시기는 세계 곳곳에 현생 인류가 출현한 후기 구석기시대(약 4만 년~1만 년 전) 전후다. 이런 무덤들은 당시 휴머니즘이 존재했다는 절대적인 증거다. 죽은 이를 묻어서 함부로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존경심이 묻어나는 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 '다음 삶'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기 구석기시대 유럽과 중근동 지역의 무덤들을 보면, 조개나 뼈 등으로 장식된 주검들이 많이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시대 여러 유적에서 사람 뼈와 다양한 장례 방식이 확인된다. 특히 울진 후포리 신석기시대 무덤은 위치나 구조 그리고 유물들로 미뤄 볼 때 대단히 복합적인 장례 절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신석기인들의 인간관과 내세관(來世觀)을 엿볼 수 있는 대단히 희귀한 유적이자, 당시 인간 존중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물이다.
경북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厚浦里).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먼 동해안 갯마을일 것이다. 강릉에서 오른쪽에 태백산맥을, 왼쪽에 동해를 끼고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린다. 바다가 평평하다는 평해(平海)를 지나면 후포리가 나타난다. 삼국시대에는 이곳에 우중국(優中國)이 있었는데, 4세기 말부터 신라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하 금강’으로 잘 알려진 석회동굴 성류굴(울진군 근남면) 암벽에는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후포리는 해안선이 고리처럼 구부러져 천혜의 항구(후포항)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후포리 동쪽 끝엔 섬처럼 생긴 등기산이 동해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로 그곳에 신석기시대의 무덤 유적이 있다. 큼직한 바위들 사이에 약 4m 직경의 구덩이가 있고, 이 구덩이 속에 무덤이 조성됐다. 1983년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해 이제는 공원화됐다. 또 이글루같이 생긴 작은 전시관에는 유적 일부가 복원 전시돼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대체로 조개무지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일상생활 터전에서 가까운 곳에 만든 무덤들이다. 그러나 후포리 무덤은 이들이 살았던 곳과는 별도의 공간에 위치해 있다. 생활의 주무대였던 바닷가와 떨어진 낮은 해안 언덕에 만들어진 차별화된 무덤인 것이다. 당시 공간의 개념이 다른 지역과는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공간이 달랐고, 이는 곧 죽음에 대한 믿음이 달랐음을 방증한다.
후포리 유적에서 발굴된 마제석부(石斧)의 숫자가 180점을 넘는다. 그런데 품질이 모두 ‘옥도끼’라 불릴 만한 수준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상등품의 석재를 선택해 실사용 도끼 크기보다 훨씬 길게 만들었고 전면을 아주 고르게 공을 들여 마연(磨硏) 가공했으며, 제작 후엔 도끼 용도로 사용하지 않은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이 석부는 실생활에 사용했다기보단 의례를 위해, 특히 죽은 사람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한 사례들이 세계 각지의 신석기유적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이 많은 석기가 한 무덤에서 발견된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당시 사람의 에너지를 생활 도구가 아닌, 의례를 위한 도구 제작에 투입했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히 중요한 사람의 장례였을 것이다. 또 그만큼 사회가 여유로웠다고도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이 마제석부들은 인골을 가지런하게 덮고 있을 정도로 매장에 정성을 들였다. 그렇다면 이 도끼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구석기시대 주먹도끼의 경우 힘이나 권력, 혹은 남성성을 상징했다. 또 신석기시대의 마제석부는 부를 상징했고, 교역품으로도 사용됐다. 현대 파푸아뉴기니의 한 민족은 결혼할 때 ‘가이마’(Gaima)라는 마제석부를 ‘신붓값’으로 사용한다. 후포리의 마제석부는 삼국시대 판상철부(板狀鐵斧)만큼 가치 있는 물건으로, 후손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 신에게 바치는 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구덩이 내부에서는 마제석부들 사이에 인골편들이 무수히 나오는데 최소 40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돼 있다. 또 인골들은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파편화돼 있었다. 남아 있는 이빨을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 대체로 20~30대 남녀들의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몇 가지 고고학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왜 젊은 사람들이 함께 묻혔을까? 왜 뼈들이 파편으로 남아 있나? 또 시체를 매장했다면 왜 제자리에 고스란히 남은 인골이 없을까? 그리고 어째서 상ㆍ중ㆍ하 3개 층으로 나뉘어 발견될까?
젊은 사람들의 뼈가 무더기로 발견되는 경우, 함께 전사(戰死)했거나 또는 전염병으로 일시에 많은 이들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후포리 유적을 설명할 근거가 되긴 어렵다. 특히 후포리 유적의 뼈들은 세골장(洗骨葬), 즉 시체가 육탈한 뒤에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다시 뼈를 추려서 매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3개 층위 구조로 볼 때, 한 번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시간 차이를 두고 반복적으로 매장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덤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시신을 매장한 후 잠시 흙으로 덮었다가 다시 파내는 작업을 반복했을까? 현재로서는 장례가 반복됐다는 점으로 미뤄, 이곳이 신성시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신석기시대 무덤들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신라시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을 발굴하면 보통 토기가 수백 점은 족히 나온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제사에 사용된 것도 있고 의례적으로 헌납하는 것도 있다. 그릇에 닭 뼈나 물고기 뼈 등 음식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후장(厚葬ㆍ넉넉하게 장례를 지냄)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실제로 같은 신석기시대 무덤인 춘천 교동 동굴 유적에서는 사람 시신 옆에 토기들이 발견됐다.
그런데 후포리에는 상당한 수준의 부장품이 있는데도 정작 토기는 한 점도 없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죽은 분을 모신 건가? 아니면, 토기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갖고 돌아갔을까? 혹시 제사는 다른 곳에서 지낸 것은 아닐까? 세골장, 즉 2차 장일 경우, 음식 제물을 올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후포리 유적에는 개인용 장신구가 몇 점 보이긴 하지만, 매장된 사람의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는 사실도 제사를 다른 곳에서 지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분명한 것은 장례 풍습이 여느 신석기시대 장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높은 언덕(등기산)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부장품들과 함께 죽은 이들을 반복해서 매장했다. 무엇보다 일상생활 터와 떨어진 곳에 사자(死者)를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은 신석기시대에 이미 사회 조직이 확대ㆍ체계화됐음을 보여준다. 상징적인 장소를 설정했다는 것은 결국 사회 통합의 필요성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정착 마을이 출현한 후 이와 같은 고고학적 현상을 ‘신의 창조’라고 하기도 하는데, 단순한 애니미즘(물신숭배)에서 진화한 종교 출현의 서막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후포리 유적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정신세계의 출현을 알린 장소라고도 볼 수 있다.
등기산(燈基山), 글자 그대로 등대의 터이다. 후포항은 울릉섬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이다. 또한 울진 해변에는 남에서 오는 구로시오 난류와 북에서 내려오는 리만 한류가 만나 동쪽 울릉도로 흐른다. 이곳 등기산에서 울릉섬을 넘어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노라면, 우리가 사랑하는 동해의 모든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이런 곳이라면, 바로 신석기시대인들이 불멸의 이상향을 그리며 한국인의 정신을 키우기에 충분했던 성소(聖所)가 아니었을까? 바로 그 자리에 무덤을 쓴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