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장면들.
#. 주인공이 새 집에 입주할 부모님을 위한 효도 선물로 주방에서 쓰는 가전을 모두 LG전자 제품으로 산다.
#. 미국에 사는 'K장남'이 동생에게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며 나이 든 한국 남성처럼 말한다.
이처럼 '한국 냄새' 풀풀 나는 '성난 사람들'이 지난 7일 골든글로브를 시작으로 14일 북미 비평가들이 주관하는 크리틱스초이스에 이어 15일 에미상까지 주요 부문 트로피를 휩쓸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12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재미교포 이성진 감독은 한국 이민자를 대변하는 상징을 드라마 곳곳에 넣어 '분노사회'의 그늘을 들춘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이날 TV조선을 통해 생중계된 시상식에서 "'성난 사람들'에 한국인이 지닌 독특한 문화적 감성과 코드가 녹아 있다"며 "그런 독특한 지점들이 주류 미국 드라마 시리즈와 다른 신선한 부분이고, 문화의 다양성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미국 주요 시상식에서 한국적 이야기가 주목받는 것은 한국인의 집단적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이런 변화는 세계 최대 문화 시장인 미국에서 한류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0년대에 화려한 K팝을 통한 한국적 환상에 대한 마니아적 환호는 미국 한류 1.0시대를 열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실상을 비튼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미국에 퍼져나가며 한류 콘텐츠의 영향력을 키운 것은 한류 2.0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미국 기업이 '성난 사람들' 같은 '한국인의 얼'이 담긴 콘텐츠를 만들어 한국의 집단적 경험을 세계에 퍼트리는 것은 요즘 한류 3.0시대의 새로운 풍경이다.
①한국 자본이 아닌 미국 자본이 ②한국 근·현대사의 경험과 한국인의 보편적 일상을 담은 콘텐츠를 직접 제작한다는 점에서 한류의 영향력이 미국 중심부로 더욱 깊숙이 파고든 것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샘 리처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이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라며 "미국인들이 아시아와 아시아계를 이해하는 데 한국 문화가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글로벌 콘텐츠에서 한국적 일상을 다루는 게 보통의 문법이 됐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이 겪은 일제강점기 경험은 세계 난민 혹은 이주민들이 지닌 상처이기도 하다. 식민 경험과 압축성장 후유증 등 한국 근·현대사에 녹아든 한국인들의 이야기가 미국에서 보편적 이야기로 급부상한 배경이다. 이 감독도 "예전과 달리 할리우드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집단적 경험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고 미국에서의 제작 분위기를 들려줬다. 이민 사회의 성장으로 미국에서 점점 커지는 있는 문화 다양성 요구와 한류에 호의적인 소비자를 동시에 잡으려고 미국 OTT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진짜 한국 이야기'를 발굴하고 나서면서 이 문화 변동에 속도가 붙었다.
미국 OTT들은 한국적 이야기의 글로벌 요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애플TV플러스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역경을 견딘 선자(김민하)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파친코' 시즌2 공개를 앞두고 있고, 넷플릭스는 미국인 주인공 키티(애나 캐스카트)가 서울의 기숙학교로 유학을 와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엑스오 키티' 시즌2 제작에 착수했다. 시즌1에서 키티는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기숙사에서 추석에 전을 부치고 잡채를 만들어 먹는다. 한국관광공사가 만든 한국 홍보 영상에 나올 법한 한국적인 장면들이 미국 드라마에서 쉴 틈 없이 나온다. 미국에서 진짜 한국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한국의 대표적 서민 음식인 김밥 열풍이 최근 미국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애덤 스타인먼 미국 마운트로열필름 대표는 "'스카이캐슬'(2018)이 한국에서 화제였을 때 미국에서도 비슷한 입시 비리로 떠들썩했다. '스카이캐슬'이 미국에 소개됐다면 인기를 얻었을 것"이라며 "미국과 한국 사회는 생각보다 닮았다. 할리우드에선 요즘 '진짜 한국 이야기'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적 문화 유전자(DNA)'가 콕 박힌 미국 드라마 제작이 늘어난 것은 미국 OTT의 한국 등 아시아계 직원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파친코' 시리즈 제작에 참여한 이동훈 엔터미디어픽처스 대표는 "(한국계 미국인인) 수 휴 프로듀서가 '파친코'로 애플TV플러스에 피칭(Pitching·투자를 받기 위해 드라마를 소개하는 일)을 할 때 한국계 미국인 직원이 감동해서 울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성난 사람들'에서 한국계 미국인들은 일자리를 구하러 한인 교회를 찾아간다. 이 감독은 한인 교회에서 찍은 사진으로 드라마 피칭 자료를 준비했다. 그는 "피칭 때 만난 임원들이 아시아계여서 작품 설명이 수월했고, 드라마 제작을 논의한 팀장도 한국계였다"며 "백인 임원들에게 한인 교회를 설명했다면 '무슨 얘기야?'라고 했을 것"이라고 기획 당시 겪은 일을 들려줬다. 넷플릭스가 지난해 낸 다양성 보고서를 보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계 임원 비율은 2020년 15.3%에서 2022년 18.4%로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