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어' 품은 라스베이거스... "도시 자체가 첨단기술 전시관" 세계를 홀렸다

입력
2024.01.16 04:30
18면
[찐밸리 이야기]<9> 미래형 도시로 거듭나는 'CES의 도시'
세계 최대 구형 공연장 '스피어'... 첨단 기술 집합
삼면이 LED 스크린... "4차원 체험, 몰입감 극대화"
깊이 12m 지하터널 운행 '베이거스 루프'도 눈길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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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비행기가 공항에가까워질 때쯤, 아래를 내려다보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저게 스피어(Sphere)구나.' 네모반듯한 건물들 사이, 동그랗게 생긴 초대형 구(球)가 우뚝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 도시를 대표하는 새 랜드마크란 사실을 누구나 스쳐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듯했다.

스피어는 라스베이거스 스트립(대규모 호텔, 리조트가 몰려 있는 약 6.1㎞ 길이의 대로) 동쪽에 위치한 세계 최대 구형 공연장이다. 당초 '2021년 개장'을 목표로 2019년 착공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공사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4년여 만인 지난해 9월 29일 정식으로 일반 관람객에게 문을 열었다. 원래 12억 달러로 예상됐던 건립 비용도 수차례의 디자인 변경, 공급망 위기, 물가 상승 등을 거치면서 거의 2배인 23억 달러(약 3조245억 원)까지 증가했다. 라스베이거스 공연장 사상 단연 최고액이다.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 2024'가 열린 9~12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엔 스피어 개장 후 최다 인파가 몰렸다. 주최 측인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13만여 명이 올해 CES를 찾았다. 4개월 전 개장한 스피어에도 CES 전시 관람객 중 다수가 들렀다. 10일 스피어를 직접 방문해 봤다.



입장료 최고 250달러... "돈·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높이 111m, 아파트로 치면 40층 높이 정도인 스피어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위엄을 뽐냈다. 지름이 157m인 만큼, 한눈에 담기가 어려웠다. 바로 앞에 다다르자 외벽에 촘촘히 박혀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디스플레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여기에 쓰인 LED의 전체 면적은 축구장 2개 반 크기와 맞먹는 5만4,000㎡. 무려 120만 개 LED가 설치돼 온종일 쉬지 않고 갖가지 휘황찬란한 영상을 건물 외벽에 투사하고 있다.

내부에 입장하려면 별도 표를 구입해야 한다. 현재 스피어 내부 극장에서 하루 평균 3회 상영 중인 영화 '지구에서 온 엽서'를 예매하면 들어갈 수 있다. 15일 기준 가격은 최저 75달러, 최고는 250달러다. 비쌀수록 시야 방해 없이 스크린을 볼 수 있다. 영화 상영 시간은 약 50분이고,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약 1시간이 추가로 주어진다.

표를 샀다고 무조건 입장이 되는 건 아니다. 입구에서 다소 깐깐한 소지품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가방은 아주 작은 크로스백 등만 허용되고, 백팩 등은 보관소에 맡겨야만 한다. 촬영 장비 등 휴대도 불가능하다. 입장객 전원을 일일이 확인하다 보니 시간도 적잖게 걸려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지만, 내부 관람을 마칠 때쯤엔 '이런 수고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나는 거대 구형 공연장, 압도적 몰입감

스피어 내부는 총 9개 층으로 이뤄졌고, 전체 면적은 8만1,300㎡에 달한다. 화려함은 외부 못지않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처럼 생긴 휴머노이드 로봇이 관람객들을 맞았고, 공중에선 홀로그램이 움직였다. 심지어 매점에도 첨단 기술이 스며들어 있었다. 바코드를 일일이 찍지 않아도 저울에 제품들을 올리기만 하면 자동으로 계산대 화면에 각 제품 금액과 지불 총액이 표시됐다.

핵심은 스피어를 세로로 갈랐을 때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대형 공연장이다. 그 자체가 최신 기술의 집합체나 다름없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1만5,000㎡), 해상도가 높은(18K) LED 스크린'이 관람객 좌석을 제외한 나머지 벽면을 꽉 채우고 있다. 360도 사방 중 270도 영역이 화면이라는 얘기다. 스피커는 무려 16만 개, 객석은 총 1만8,600개다. 좌석 대부분엔 4차원 체험이 가능하도록 바람, 진동 등을 전달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다만 처음 객석에 앉았을 땐 일반 극장처럼 전면에만 화면이 켜 있었다. 영화 흐름상 몰입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다.

스피어 개장을 맞아 특별 제작된 영화 '지구에서 온 엽서'는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도착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내용이다. 영화 '블랙 스완'으로 유명한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연출했다. 영화 시작 10분가량이 지났을까, 우주를 떠돌던 우주선이 지구에 내려앉자 전면에만 있던 화면이 갑자기 천장과 좌우 양옆까지 확장됐다. 진짜로 지구 외부에서 지구로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을 줬다. 졸려서 감길 뻔했던 눈이 번쩍 뜨였다.

3개 면을 화면으로 채우는 기술이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스피어 내 공연장은 각진 모서리 없이 모든 벽면이 부드럽게 이어진 형태이다 보니, 몰입감이 극대화됐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각도의 최고치를 구현했다는 아이맥스 스크린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함께 관람한 일행과 한목소리로 평했다. "돈이 아깝지 않다. 스피어는 라스베이거스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다."



팬데믹과 함께 찾아온 CES의 위기, 그리고 부활

올해로 57회째를 맞은 CES는 명실상부 세계 최대 기술 전시회다. 가전 전시회로 시작했지만, △모빌리티 △우주·항공 등으로 전시 분야가 점차 확대되면서 종사 업종과 관계없이 '올해 기술 동향을 파악하자'는 이들로선 건너뛸 수 없는 행사가 됐다.

CES가 처음부터 라스베이거스와 함께했던 건 아니다. 첫 CES는 1967년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렸다. 해마다 한 차례였던 전시회가 1978년부터 연 2회로 늘어나자, 라스베이거스에선 '겨울 CES'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매년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번만 열리는 현행 방식이 정착된 건 1998년이다.

예상치 못한 팬데믹 발발은 CES에도 위기였다. 팬데믹이 본격화한 2020년엔 예년처럼 정상 개최됐으나, 2021년엔 온라인으로 치러졌다. 2022년 미국 내 격리가 느슨해지면서 오프라인 행사를 되살렸지만 무리라는 평가가 많았다. 원래 참가하기로 했던 업체 중 42곳이 전시 일주일 전 이를 취소했다. 해당 기업들의 부스는 전시장 총면적의 약 7%를 차지했다. 결국 나흘 일정으로 잡혔던 전시회는 하루 일찍 조기 폐막했다.

지난해 초 주최 측인 CTA는 3년 만에 CES를 정상 개최하며 CES의 부활을 알렸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중국 업체의 대거 불참이 대표적이다. 2018년 1,500개였던 중국의 참가 기업 수는 작년엔 3분의 1 수준인 약 500곳에 그쳤다. 미중 관계 악화로 올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CES의 최고 큰손인 중국 업체들의 '부재'는 CES로선 막대한 손실이다. "CES도 이제 끝물"이란 평가가 지난해 전시회 전후 테크업계에서 나돌았던 이유다.



머스크의 '루프' 등 도시 전체가 첨단 기술 향연

그러나 올해를 기점으로 CES에 대한 전망은 다시 쓰일 듯하다. 떠났던 중국 업체들이 돌아왔고(작년의 2배인 1,100여 곳 참가), 전체 관람객 수도 팬데믹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특히 이번 CES 기간 중 현장을 찾은 이들은 "이 정도 규모의 테크 행사를 개최할 도시는 라스베이거스뿐"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큰 전시장을 갖췄기 때문만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첨단 기술로 무장, '미래형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어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스피어, 그리고 '베이거스 루프(Vegas Loop)'다. 베이거스 루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2016년 설립한 보링 컴퍼니를 통해 라스베이거스 지하에 만든 교통수단이다. 깊이 약 12m, 길이 2.7㎞의 지하터널에서 주행한다. 현재까지 개통된 역은 5개에 불과한 데다 속도 규제 탓에 사람이 운전하는 테슬라 차량 한 대가 최고 시속 64㎞로 오갈 뿐이지만, 앞으로 역을 50여 개까지 늘려 무인 자율주행 차량으로 도시 전체를 연결하겠다는 계획이다. 이후 라스베이거스의 루프 시스템을 미국 전역에 깔고 화성 개발에도 활용하겠다는 게 머스크의 큰 그림이다.

해마다 세계의 많은 도시가 CES에 버금가는 전시회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올해 CES를 찾은 오세훈 서울시장도 "서울에 한국판 CES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유념할 대목은 CES의 경쟁력이 전시회 자체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이기 때문에' 매년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한다는 사실을 이 도시의 변화가 보여주고 있다.

라스베이거스= 이서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