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든, 기업이든 남성 비율이 많은 조직에서 성평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관련 교육이 의무화되면서 강연장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강제로 원치 않는 내용을 들어서 짜증이 난다는 걸 얼굴에 당당히 드러낸 이들의 노골적인 무관심은 단순한 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발끈할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다가온다. 질의응답 시간에 맞춰 타이머만 째깍째깍 거릴 뿐, 강연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없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상황이다. 무관심한데 어떻게 질의 폭탄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강사가 무슨 말을 한지 알아야지 따지기라도 할 건 아닌가. 그러니 걱정은 기우인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문화의 힘은 강하다. 그 바닥에선 비논리적인 게 논리적으로 통하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딜 가든 이런 질문이 남성의 입에서 등장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남자도 살기 힘들어 죽겠어요.” 내버려두면 같은 추임새가 붙는다. “여자는 권리만 주장하죠.”
두 시간에 걸쳐 성별 고정관념이 강화된 사회에서 강한 남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말했는데 그런 반응이 나오면 황당하다. 성평등은 당연히 성불평등을 짚어야만 가능하고 이를 개선하려면 일상 속 고정관념을 깨야한다.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들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처럼 남성에게 강요하는 허상이 얼마나 개인을 어그러지게 하는지를 따져 묻자는 게 내 주장이자 남성학의 요지다. 그러니 왜 남성의 고충을 말하지 않냐고 분노하거나 여성을 증오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성학'과 '남성고충상담'이 구분되지 않더니, 조금이라도 페미니즘의 결이 있다면 마음껏 조롱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도 늘어났다. 실제 요즈음 성교육 현장에는 역차별 운운하며 페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강사도 허다하다. 이런 것들이 모여 공격 신호가 된다. 이런 게 남성에게 효과라도 있을까.
“이 길(여성을 공격하는 길)은 구원으로 향하지 않는, 너무도 슬프고 암울한 길”(57쪽)이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의 저자 스기타 슌스케는 말한다. 자신을 짓누르는 정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다른 성별과의 비교만이 전부가 되는 남성은 남자'도' 괴롭다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그저 남자‘가’ 지쳤다고 솔직하게 말만 해도 충분히 공감과 연대로 나아갈 수 있음을 다정하게 덧붙인다. 인간으로 태어나 남성 역할을 하는 것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어떤 성으로 태어났든 말든 인간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냐고 격려한다.
“남성학은 여성학과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문제를 수용해 남성들이 자기 자신에게 다시 묻는 학문”(58, 59쪽)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페미니즘에 날을 세우며 남성들의 억울함을 털어놓는 게 얼마나 번지수가 틀렸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적’을 오인해 진흙탕 싸움처럼 서로를 미워하지 말고 이 세상의 시스템에서 당당히 맞서야 한다. (…) 증오하지 말고 분노하라. 이 사회에 분노하라.”(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