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전쟁은 가짜 뉴스" "평화 택하자"...중국 위협 속 쪼개진 대만

입력
2024.01.10 04:30
8면
라이칭더 유세 현장 "민주주의 지키자" 함성
유세장 옆 군함 2척 눈길...강한 대만 메시지 
허우유이 "전쟁 피하고 평화 선택하자" 호소
선거 나흘 앞두고 "중국 위성 발사" 경보 문자 날아들어
중국 군사 위협에 오히려 민진당 지지 상승 '역풍' 가능성도

"총통 하오(總統好), 총통 하오."

8일 오후 9시. 대만 최북단 항구도시 지룽시 궈먼항 광장에 민주진보당(민진당) 총통 후보인 라이칭더 현 부총통이 등장하자 지지자 1만여 명의 함성이 지룽시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들은 마치 그가 이미 당선되기라도 했다는 듯 "총통님 안녕하세요(총통 하오)"라는 구호를 수십 차례 연발했다. 광장 안은 민진당을 상징하는 '녹색 깃발'이 빼곡했고, 미처 유세장에 들어오지 못한 녹색 인파까지 더해지며 지룽시는 녹색 장관을 이뤘다.

'반(反)중국·대만 독립' 노선을 추구하는 민진당의 라이 후보는 "민주주의 수호"를 강조했다. 광장 연단에 선 그는 "중국이 (대만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대만의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외쳤다.

같은 날 대만 중부 타이중시에서 유세에 나선 허우유이 국민당 총통 후보는 "대만은 평화를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친(親)중국 성향이 강한 제1야당 국민당은 민진당의 독립 노선을 비판하고 있다. 허우 후보는 "대화를 통한 양안(중국과 대만)관계 안정을 도모해 전쟁을 피해야 한다"며 "대만이 더 번영하는 길을 만들자"고 밝혔다.

13일 실시되는 대만 총통 선거는 두 후보 각축 속에 커원저 민중당 총통 후보가 뒤를 쫓는 형국이다. 현지에서 만난 대만 유권자들은 각자 지지하는 후보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중국의 군사 위협 속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 결과는 양안관계는 물론 미중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중대 정치 이벤트다. '미중 대리전'이라는 해석도 있다. 전 세계가 이번 선거를 주목하는 이유다.

민진당, '군함' 옆에서 유세...'안보' 강조


민진당은 안보 위기를 부쩍 강조하고 있었다. 이날 지룽시 유세 현장에는 차이잉원 현 총통, 린유창 내무장관 등 거물급 인사도 나왔다. 이들은 하나같이 "대만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주체는 민진당뿐"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연설 한마디 한마디마다 "뚜이(對·맞다)"라는 지지자들의 호응이 뒤따랐다.

이날 유세는 초계함 2척이 정박해 있는 군항에서 불과 20m 떨어진 곳에서 이뤄졌다. 중국의 군사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방력을 키워온 민진당을 믿어달라는 호소로 느껴졌다.

국민당은 '장징궈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허우 후보는 7일 장징궈의 손자 장완완 타이베이 시장과 함께 유세에 나섰다. 장징궈는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의 아들이자 2대 총통이다. 중국 공산당과 싸웠지만 '하나의 중국' 노선을 지켜온 대만의 정통성을 이어가자는 호소다.

신베이시에 위치한 국민당 선거본부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우잉치(60대)씨는 "허우 후보가 당선되면 즉시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가 시진핑 주석과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8년간 중국과 대치하며 안보 불안감만 높인 민진당과 달리 국민당은 양안관계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것이란 얘기였다.

국민당 "시진핑과 대화할 것"...'평화' 강조


9일 현재 판세는 민진당의 '아슬아슬한 우위'다. 여론조사 공표 금지 시한 직전인 2일 대만 현지 매체 연합보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민진당의 라이 후보·샤오메이친 부총통 후보는 32%의 지지율을 얻어 국민당의 허우 후보·자오사오캉 부총통 후보(27%)를 5%포인트 차이로 따돌렸다. 제2야당인 민중당의 커원저 총통·우신잉 부총통 후보는 21%로 3위를 유지했다. 1~2일 발표된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라이 후보와 허우 후보 간 차이는 오차범위 안팎인 3~5%포인트에 불과했다.

최대 변수는 중국이다. 선거를 불과 나흘 앞둔 9일 오후 3시 18분쯤 타이베이에 머물고 있는 기자 휴대폰에 경보 문자가 날아들었다. "중국이 15시 4분 발사한 위성이 남부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며 시민들은 안전에 유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영문 경보에는 위성이 아닌 '미사일(missile)'로 '오기'되면서 긴장감을 더했다.

중국은 이날 오후 '아인슈타인 탐사 위성'을 발사했다. 탐사 위성이지만, 위성 발사 기술이 미사일 기술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점에서 총통 선거를 앞둔 사실상의 무력 시위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밖에도 중국은 이번 선거 정국 내내 군용기·군함·정찰풍선을 대만해협에 보내, 언제든 대만을 향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민진당 지지 여론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대만에 '중국 위성 발사' 경보 문자... 중국 군사 위협 '역풍' 가능성도

반면 대만 주요 도시에서 만난 많은 학자와 시민들은 군사력을 앞세운 중국의 위협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익명을 요구한 타이베이의 한 대학 교수는 "시진핑 3기 체제 들어 유독 더해진 중국식 '전랑(늑대 전사)외교'에 많은 대만인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다"며 "중국이 어느 때보다 깊숙이 선거에 개입하고 있지만 허우 후보 지지율이 여전히 2위인 게 증거"라고 덧붙였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이 대만해협에서 군사적 위기감을 증폭시킬 군사 행동에 더 나설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고 전했다. '국민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섣불리 군사 행동에 나섰다가 오히려 민진당 표심이 집결하는 역효과'를 중국이 우려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라이 후보 유세 현장에서 만난 대학생 장모(24)씨는 "대만의 젊은이들은 중국의 군사 위협이 그저 위협일 뿐이라는 점을 잘 안다"며 "중국이 개입하려 하면 할수록 중국 주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대만인들은 국민당과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만 총통 선거를 앞뒀던 2000년 주룽지 당시 중국 총리는 "대만 독립은 곧 전쟁"이라고 말했다가 민진당 지지세만 높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6년 선거 당시에도 중국은 미사일 도발(3차 대만해협 위기)에 나섰지만, 대만 독립주의자 리덩후이의 당선을 막지 못했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에서 만난 타이스중 민진당 타베이베이시 선거본부장은 "총통 선거 때마다 전쟁론이 등장했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민진당이 재집권하면 전쟁 위기가 커진다는 중국과 국민당의 주장은 일종의 '가짜 뉴스'"라고 지적했다. 반면 자신을 국민당 지지자라고 소개한 택시 운전 기사 궈모(50대)씨는 "전쟁이 난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느냐"면서도 "양안관계 안정을 추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이 국민당 승리가 힘들다고 판단할 경우 대형 군사 도발이나 추가적인 대만산 제품 금수 조치 등의 충격파를 던져 선거 막판 민심 흔들기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룽·타이베이·신베이= 조영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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