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의 충절은 솔숲에 잠들고... 옥빛 물결 넘실대는 몽환의 호수

입력
2024.01.10 04:30
20면
논산 탑정호 주변

바람이 세지 않은 날이었는데도 물결은 끊임없이 넘실거리고, 호숫가에는 해변처럼 파도가 찰랑거렸다. 대둔산 서쪽 골짜기의 물줄기를 흡수한 호수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바다처럼 푸르스름한 옥빛을 띠고 있었다. 탑정호는 드넓은 논산평야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 만들었다. 예산 예당호에 이어 충남에서 두 번째로 넓은 호수로, 논산 시내 동쪽 부적면 연산면 가야곡면 양촌면 4개 면에 걸쳐 있다. 지리적으로 논산의 중심이자 지역에서 가장 공들이는 관광명소다. 주변으로 발길을 옮기면 논산의 역사와 인물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온다.


수변공원 덱 탐방로 따라 출렁다리까지

탑정저수지 제방 북측 끝에 ‘논산탑정리석탑’이 있다. 고려시대 석등 양식의 부도탑이다. 탑정호가 완공된 건 일제강점기인 1944년, 석탑은 물에 잠긴 어린사라는 사찰에서 옮겨 왔다. 번듯한 명칭과 달리 상단부가 사라진 탑신은 왜소하고 다소 볼품없지만, 탑정리와 탑정호라는 이름은 바로 이 작은 탑에서 유래한다.



탑정호가 관광명소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2020년 호수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가 완공되고부터다. 부적면과 가야곡면을 잇는 길이 600m 현수교를 걸으면 마치 공중에 뜬 것같이 아찔하고, 꿈속을 걷는 듯 몽환적이다. 2개의 주탑 사이 다리 한가운데에 전망 덱이 설치된 형태다. 이름처럼 많이 출렁거리지는 않아도 바닥이 쇠그물과 유리로 돼 있어서 약간의 흔들림에도 멀미가 느껴진다.

탑정호 출렁다리는 겨울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장 마감 4시 30분) 무료로 개방한다. 남측 제3주차장에 차를 대면 다리까지 수변 산책로를 따라 약 1km를 걸어야 한다. 북측 4-1주차장에서 출렁다리까지는 약 200m여서 대개 이 주차장을 이용한다. 대신 카페와 음식점은 제3주차장 주변에 몰려 있다.

주차장 번호에서 짐작하듯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산책로가 연결돼 있다. 출렁다리 다음으로 여행객이 즐겨 찾는 곳은 호수 동쪽 수변생태공원이다. 늪지대에 잔디마당, 잠자리연못, 들꽃길, 억새길, 창포원 등의 정원을 꾸몄다.






정원에서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룬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출렁다리까지 수상 덱이 연결돼 있다. 물속에 뿌리내린 커다란 나무 아래에 억새와 갈대가 일렁거리고, 수풀 사이에서 물닭과 청둥오리 등 철새가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다. 허가받은 어민이 이따금씩 쪽배를 몰고 나와 그물을 건지는 모습도 보인다. 봄여름 들판을 풍성하게 적시는 수원이자, 새들과 주민들에게 또 다른 보금자리인 셈이다. 무엇보다 해질 무렵 출렁다리 방향으로 떨어지는 일몰이 인상적이다. 하늘과 수면이 붉게 물들고 주위가 어둑해지면 호수가 마치 바다처럼 보인다.

황산벌 전투와 계백장군 유적지

탑정호 수변생태공원과 인접한 산자락에 계백장군 유적지가 있다. 장군과 5,000 결사대의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대부터 조성한 유적이다. 백제의 충절을 상징하는 장수 계백은 의자왕 20년(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5,000 백제군은 지형이 험난한 요충지 세 곳에 진을 치고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전의를 가다듬은 5만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패배했고, 계백도 장렬히 전사했다. 이른바 황산벌 전투다.



유적지는 백제군사박물관을 중앙에 두고 계백장군 동상과 묘, 전망대인 황산루와 체험시설을 산책하듯 돌아볼 수 있게 꾸몄다. 말 위에서 힘차게 칼을 뽑는 형상의 동상에서는 탑정호와 주변 풍광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계백장군 묘 주변은 정갈한 소나무숲으로 조성돼 있다. 백제 유민들이 시신을 은밀하게 가매장한 것으로 전해질 뿐인데, 1976년 부적면 주민들이 '계백장군 묘소 복원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기금을 모아 봉분을 쌓은 것이 오늘날 성역화 사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인근 마을에서 장군의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은 조선 숙종 6년(1680)년 충곡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며 공식화됐다.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충곡서원은 계백을 비롯해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사육신을 배향하고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절개를 지키고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논산에는 지금도 10개의 서원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돈암서원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사계 김장생(1548~1631)을 기리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사계는 이이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스승으로, 조선 예학의 태두로 꼽히는 인물이다.

돈암서원은 조선 효종 10년(1659)과 이듬해인 현종 원년(1660) 두 번에 걸쳐 사액을 받은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도 보존돼 영호남 8개 대표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라 있다. 커다란 누각(산앙루)을 뒤로 하고 서원으로 들어서면 유생들이 강학하던 양성당이 정면으로 보이고, 특이하게도 건물 바로 앞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업적을 적은 비로,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다.

바로 옆 3면이 누마루인 정회당은 작지만 정감 어린 기품이 넘친다. 서원이 창건되기 전 사계의 부친이 강학하던 건물로 1954년 대둔산 고운사 터에서 옮겨 왔다. 서원에서 가장 웅장한 응도당은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다른 서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첨지붕(눈썹처마) 구조를 지니고 있고, 대들보의 비늘 무늬가 용이 꿈틀거리듯 생동감 넘쳐 보물로 지정돼 있다.



돈암서원이 위치한 곳은 논산시 연산면, 조선시대에는 은진현·노성현과 함께 독립된 현으로 지역의 중심이었다. 호남선 철도 연산역은 여행자에게 소소한 볼거리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연산역 급수탑은 1911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약 60년간 사용돼 왔는데, 벽돌을 쌓은 모양이 첨성대와 비슷해 주목받고 있다. 상하행선에 하루 10여 차례 열차가 서는 역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는 KTX 모형이 있고, 4개 객차를 연결한 기차문화 체험관도 있다. 역 광장으로 나가면 ‘연산문화창고’가 있다. 옛 곡물창고 여러 동을 개조해 카페와 전시실, 지역 커뮤니티 시설로 쓰고 있다. 잠시 몸을 녹이며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이다.


미륵불, 개국사찰, 꽃창살... 논산 대표 3개의 사찰

논산의 대표 사찰도 탑정호를 중심으로 서·남·북 세 방향에 자리 잡고 있다. 고찰의 짜임새로는 다소 허술하지만 각기 하나씩은 자랑거리를 품고 있다. 탑정호 서쪽 반야산 기슭의 관촉사는 일명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유명하다.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 19년(968) 승려 혜명이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관촉사로 들어가는 마을 어귀에 ‘은진미륵 앞에서(고덕상)’란 시비가 세워져 있다. ‘미소 짓듯 감은 두 눈, 터질 듯 풍만한 앞가슴, 복스런 두 귀, 엄지 중지 둥글게, 두터운 입술 거룩한 웃음’. 오랫동안 불상을 뜯어본 지역 시인의 문장에 세상을 제도하는 미륵불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몸에 비해 지나치게 길고 큰 머리, 한껏 과장된 이목구비가 균형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대범하면서도 독창적이라 평가되는 조각이다.

탑정호 북쪽 연산면의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고려 개국을 기념해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다. 왕건은 936년 황산군(현 연산면)에서 후백제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공덕에 보답하기 위해 사찰을 창건하기로 마음먹었다. 940년 사찰이 완공된 후에는 친히 낙성화엄법회를 베풀고, 부처 앞에 죽은 이의 죄와 복을 아뢰는 소문(疏文)을 짓기까지 했다.


새 나라 고려의 태평성대를 꿈꾸던 사찰은 왕건 사후 개경과 거리가 멀어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조선 세종 때 불교진흥책으로 잠시 중흥의 기틀을 보였으나 그 뒤 폐허가 됐다고 한다. 1934년에 이르러서야 절터에서 발견한 삼존석불을 세우고 절을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진전에 왕건의 어진을 봉안하고, 당시 것으로 추정되는 삼존석불은 극락전 안에 모시고 있다.

탑정호 남쪽 전라북도와 경계 지점에 쌍계사라는 사찰이 있다. 고려 때 창건해 전각을 모두 합하면 500~600칸에 이를 정도로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현재 종루를 통과하면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건물만 덩그러니 도드라진다. 조선 숙종 때인 1716년에 세워 화재로 전소된 것을 1739년 중건했다고 한다. 커다란 나무기둥을 조각보처럼 덧대고 보수한 흔적이 선명해 300년 가까이 된 건물의 무게감을 더한다. 정면 빛바랜 꽃 창살도 고찰의 풍모를 더해 준다.




쌍계사 가는 고갯길에 성삼문 묘가 있다. 외가인 충남 홍주(홍성)에서 나고 한양에서 자란 그의 묘가 이곳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삼문은 세조 2년(1456)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해 한강에서 끔찍하게 처형됐다. 갈갈이 찢긴 그의 시신은 팔도에 조리돌림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곳에 한쪽 다리가 묻히게 됐다고 한다. 묘는 상석과 문인석, 석주 등으로 제법 모양새를 갖췄다. 만고역적에서 절개의 상징으로 되살아난 그의 묘는 단종이 잠든 영월 장릉을 향해 있다.



논산=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