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1998년 수소 연료전지 연구개발(R&D)을 시작해 글로벌 자동차 회사로는 드물게 25년 넘게 이어왔다. 수소차는 달리는 과정에서 탄소를 내뿜지 않아 '달리는 공기청정기'로 불릴 만큼 친환경적이지만 수소를 생산·저장하고 운송하는 과정이 어려워 시장의 성장은 더디다. 그럼에도 현대차는 또다시 '수소'를 열쇳말로 꺼내 들었다. 정의선 회장의 뚝심이 읽히는 부분이다.
현대차는 9일(현지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IT) 박람회 'CES 2024'에 하루 앞선 8일 만달레이베이 컨벤션 센터에서 미디어데이를 열고 '수소'와 '소프트웨어'를 중심에 두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현대차는 이를 '수소와 소프트웨어로의 대전환: Ease every way'라고 이름 붙였다.
이날 정 회장은 가죽 재킷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는 500명 넘는 국내외 취재진이 모인 행사장 맨 앞에 앉아 끝까지 내용을 꼼꼼히 챙겼다. 정 회장은 직접 무대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행사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수소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현대차는 이날 수소 에너지 생산부터 저장, 운송, 활용 등을 통합하는 'HTWO Grid'(에이치투 그리드) 비전을 발표했다. HTWO는 2020년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수소연료전지 사업 브랜드로 수소를 뜻하는 분자식(H2)을 표현하는 동시에 수소(Hydrogen)와 인류(Humanity)의 영어 앞글자를 땄다. 이날 발표한 HTWO Grid는 현대모비스, 현대로템 등 그룹 내 계열사를 하나의 가치사슬로 엮고 각자의 역량을 그물망처럼 연결해 생산부터 활용까지 수소 사업 생태계를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그린수소1 생산을 위한 메가와트(㎿)급 양성자 교환막(PEM) 수전해2 시스템을 몇 년 안에 양산할 계획이다. PEM 수전해는 알카라인 수전해 대비 수소 생산 비용이 1.5배 정도 비싸지만 부품과 생산 시설 공유 등으로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현대차는 보고 있다. 현대차는 음식물 쓰레기, 가축 분뇨 등을 정제해 수소로 변환하거나 폐플라스틱을 액체 상태로 녹여 수소를 생산하는 기술도 꺼내 보였다.
이 회사는 이런 기술들의 실현을 위해 서울 광진구에서 이동형 수소 충전소를 운영 중이고 인도네시아 정부와 수소 관련 실증사업에 참여할 계획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엑시언트 수소전기차 30대가 친환경 테스트를 받고 있고, 조지아주에서는 수소 충전소 등 인프라를 마련하고 있다. 또 현대차는 연간 수소 소비량을 지난해 1만3,000톤에서 2035년까지 300만 톤으로 늘리고 수소전기차 넥쏘의 후속 모델을 내년 출시한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장재훈 현대차 사장은 "수소 (대중화가) 어렵다고 하는데 누군가는 해야 하고 안 하면 (다른 업체에) 뺏길 수 있다"며 "여러 가지 부침이 있지만 사명감을 갖고 과감하고 꾸준히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이날 소프트웨어를 중심에 두고 모든 것과 연결하겠다는 의미로 'SDx'(Software-defined everything)도 발표했다. SDx는 모든 이동 수단과 서비스가 자동화·자율화하고 끊임없이 연결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앞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떼내 따로따로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자동차의 무게중심을 하드웨어인 기계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두는(SDV) 대전환을 예고했다. 자동차는 통신을 통해 소프트웨어를 자동 업데이트하고 서비스를 최신 상태로 유지하면서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차량용 소프트웨어는 이동 정보와 차량 상태 등 데이터를 모으고 인공지능(AI)이 스스로 공부한다. 학습된 정보는 차량뿐만 아니라 도심 교통 체계, 물류 체계 등과 이어져 미래형 도심 모빌리티 생태계를 만든다. 이것이 SDx의 궁극적 목표라고 현대차는 설명했다.
이를 위해 회사는 자체 운영체계(OS)를 개발하고 외부 개발자들이 참여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처럼 다양한 응용 서비스를 만들 수 있게 '소프트웨어 개발키트'(SDX)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자체 개발한 대형언어모델(LLM) 기반 음성어시스턴트(비서)와 AI 내비게이션도 차량에 적용해 사용자가 더 편리할 수 있게 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정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차의 소프트웨어 부분은 미흡하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이날 발표 후 '올해 그룹에 전할 메시지'를 묻는 기자들에게 "안전을 위해 IT를 많이 접목했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그는 3일 신년사에서 "소프트웨어 경쟁에서 (우리가) 뒤처진 면이 있다"고 말했다. 송창현 현대차·기아 SDV본부장 겸 포티투닷 대표(사장)는 이후 기자 간담회에서 "현대차는 이제야 시작하지만 빨리 속도를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