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의 구성원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넘어 인격적으로 완전히 말살한 범죄다.”
이현복 수원지법 여주지원 형사부 부장판사는 지난달 22일 특수상해교사, 강제추행, 감금,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무속인 부부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의 범행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들 부부는 19년간 자신에게 의존하던 일가족을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해 수억 원을 빼앗고, 성범죄까지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어떻게 한 가족을 상대로 오랜 기간 패륜적인 범행을 저지르면서 경찰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을까.
5일 법원 판결문과 경찰 등에 따르면, 무속인인 50대 A씨와 B씨 부부가 피해자인 C(50대 여성)씨를 곁에 둔 건 2004년부터다. 당시 C씨는 남편과 사별한 뒤 불안한 마음에 평소 알고 지내던 A씨 부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의지했다. 자신이 일하러 나가면 10대 어린 자녀를 돌봐주던 A씨 부부가 마냥 고마웠다. C씨의 세 남매도 자신들을 어릴 때부터 챙겨준 A씨 부부를 ‘이모네’라고 부르며 엄마보다 더 따랐다고 한다.
A씨 부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에게 기대던 C씨와 어린 세 남매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훈계하는 정도에서 시작해 점차 강도를 높여 가족끼리 서로 폭행 및 감금하도록 강요·지시하는 등 범죄 행위의 경계를 넘어섰다. 범행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가족을 다른 가족이 폭행하게 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집 안에 13대의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일가족 휴대폰에는 위치추적 애플리케이션(앱)을 깔아 C씨 가족 일상을 감시했다.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시간까지 통제한 것으로 조사됐다. 평소 A씨 부부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며 심리적 지배 상태에 있던 C씨는 별다른 저항을 못했다. 이들은 C씨에게 “내 말을 잘 들어야, 가정이 평안하고 아이들도 잘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에게 복종하도록 했다.
부부에게 심리적 공포감을 갖고 있던 세 남매는 성인이 된 뒤에도 이들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점을 이용해 부부는 돈까지 갈취했다. 2017년 1월 성인이 된 막내에게 “가족 생활비로 사용할테니, 급여 관리를 이모에게 맡겨라”고 말하면서 급여통장과 해당 은행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를 빼앗는 등 2021년 1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통장 3개와 체크카드 3장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 이 기간 갈취한 돈만 2억5,000여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들 말이면 무조건 따르면 심리상태를 범행에 이용하기도 했다. 부부는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남매에게 각각 2,000만∼8,000만 원을 대출받도록 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로 빠지게 한 뒤 자신들에게 더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경찰 관계자는 “세 남매가 어린 시절부터 A씨 부부에게 공갈 및 협박을 당해 겁을 먹은 상태였기에 본인 명의의 통장과 신용카드까지 뺏기고 대출까지 받았다”며 “엄마인 C씨는 사실상 방임했다”고 밝혔다.
범행의 정도는 점차 더 심각해졌다. A씨 부부는 2022년 11월~2023년 1월 남매가 자신들이 키우는 고양이를 함부로 대했다는 이유로 C씨에게 자녀들을 폭행하라고 시켰다. 이어 C씨에게 가스 불에 달궈진 숟가락을 가져오라고 한 뒤 지지라고 지시했다. C씨는 남매의 손등과 얼굴, 목 부위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 화상을 입혔다. 이런 행위는 2023년 3월까지 네 차례, 수 회에 걸쳐 지속됐다. 이 때마다 부부는 C씨에게 “지져”라고 소리를 쳤다. 부부는 또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C씨에게 자녀 중 한 명을 입으로 물라고 지시했고, C씨는 이 말을 따라 아이를 물어 다치게 한 사실도 드러났다.
패륜범죄도 서슴지 않았다. 부부는 남매 간 성관계를 강요 협박한데 이어 이들에게 옷을 벗게 한 뒤 나체를 촬영하는 등 성범죄도 저질렀다. 이들은 일가족 간의 성추행 행위가 촬영된 자택 내 CCTV 영상을 보관하면서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길고 긴 범행은 지난해 4월 세 자녀 중 첫째가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이웃집으로 도망치면서 발각됐다. 처음에는 단순 가정폭력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경찰수사 단계에서 C씨가 어렵사리 입을 열면서 가스라이팅 범죄의 실체가 드러났다. 경찰이 수사에 나설 당시 A씨 부부는 집 주인인 C씨 가족들은 부엌에서 생활하도록 하고 5개의 방에는 자신들이 데려온 고양이 5마리를 한 마리씩 두고 키우는 등 거주지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일과를 마친뒤 퇴근해 C씨 집에 들러 C씨와 성인이 된 자녀가 일용직으로 벌어온 일당까지 수금하듯 가져간 사실도 밝혀졌다. 수사 초기 자녀들을 상해한 혐의로 무속인 부부와 함께 구속됐던 친모 C씨는 검찰 수사 단계에서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정황이 확인돼 구속이 취소돼 현재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1심 재판부인 이현복 부장판사는 “친모를 이용해 불에 달군 숟가락으로 자녀들을 지지게 하고, 성적인 행동을 강요하는 등 그 범행의 방법이 매우 가혹하고 패륜적이다”며 A씨에게 징역 15년을, 아내 B씨에게는 징역 10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 판사는 “경찰 수사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범죄가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하며 허위진술을 강요하는 등 피해자들에게 더 큰 절망감을 안겨줬다”고 꾸짖었다.
이와 비슷한 가스라이팅 범죄는 최근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60대 신도를 심리적으로 지배해 14억 원을 갈취한 60대 종교인이 구속돼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이 종교인은 “나는 살아있는 부처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이 죽는다”는 등의 말로 60대 신도가 자신의 말만 듣도록 조종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신종 범죄유형인 가스라이팅에 대한 정밀 진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윤정숙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회가 다양화·선진화되면서 고도의 책략과 간교한 속임수로 상대의 심리를 지배해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려는 신종 범죄 유형이 더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가스라이팅 범죄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진행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원인을 분석해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거나 법의 틈새를 메우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속인 부부 사건을 수사한 여주경찰서 관계자는 “아이들 모두 보복이 두려워 자포자기 심정으로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고, 주변 이웃들도 수상한 점을 느꼈으나 신고는 하지 않았다”며 “은밀하게 이뤄지는 가스라이팅 범죄 특성상 주변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