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낯가림이 너무 심해 걱정이에요.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었거든요."(블랙핑크 제니)
"낯가리면 어때. 여러 나라를 돌며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그 낯가림이 너를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이효리)
2일 오후 7시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 공개홀. 음악프로그램 '이효리의 레드카펫' 녹화에서 이효리는 제니의 고민을 이렇게 들어줬다. 이효리는 특유의 공감 어린 대화로 까마득한 후배와의 벽을 허물었다. "내가 싫어했던 부분도 때론 사람들이 사랑해 주더라"는 이효리의 응원에 제니는 "'혼자 뭘 할 수 있지?'라고 스스로 계속 묻다가 용기 내 부딪혀보기로 했다"며 최근 '1인 기획사'를 차린 얘기를 꺼냈다.
핑클로 데뷔한 2000년대 간판 여성 아이돌과 블랙핑크로 세계를 누비며 요즘 K팝의 아이콘이 된 아이돌의 만남. 그간 TV에서 좀처럼 개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제니는 이효리가 데뷔 후 처음으로 혼자 음악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한달음에 찾아왔다. 이효리의 노래 '미스코리아'를 둘이 함께 불렀다. 제니가 KBS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2016년 데뷔 후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전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와 KBS의 해묵은 불화로 그간 KBS에선 블랙핑크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YG를 떠나 홀로서기에 나선 제니부터 악동뮤지션의 이찬혁 그리고 신동엽, 이정은까지. 이효리는 '레드카펫' 첫 녹화에서 다양한 분야의 손님을 불러 그들과 방청객 사이 소통의 다리를 놨다. '레드카펫'은 KBS 시즌제 일요일 심야 음악프로그램 '더 시즌즈' 일환으로 이효리는 이찬혁의 뒤를 이어 5일 첫 방송부터 이 쇼를 이끈다. 이효리는 "제주에서 오래 살면서 음악적으로 선후배들과 소통하는 것에 갈증을 느꼈다"며 "내가 부르면 좋을 음악도 물어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계기를 들려줬다.
이효리는 하늘색으로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기념하는 듯한 차림이었다. 그는 먼저 "화려한 우리들을 위한 밤"이라고 노래('풀문')하며 쇼의 문을 열었다. 관객에 말을 거는 이효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안 떨릴 줄 알았는데 오랜만에 떨어본다"며 "마흔 살 이후엔 떨릴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분 좋은 떨림은 오랜만"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녹화장엔 이효리를 응원하기 위해 그의 남편이자 기타 연주자인 이상순도 자리했다.
'음악프로그램 손님'답지 않은 이들의 깜짝 무대는 이날 녹화의 백미였다. '이효리의 예능 단짝'이었던 신동엽은 "여러 가지로 힘들 때 이 노래를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며 봄여름가을겨울의 히트곡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불렀고, 이효리의 연기 스승이었던 이정은은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열창했다. 이효리는 "선물 같은 첫 녹화였다"고 초대 손님과 관객들에 고마움을 전했다.
이효리는 KBS를 수신자로 쓴 편지를 읽으며 무대와의 다음을 기약했다.
"내가 제주에서 지낸 10년 세상은 많이 변했고 다들 자리를 옮겼더라. 근데 넌 이 자리 그대로 여기에 있네. 로비 입구, 낡은 계단, 오래된 자판기까지. 이제 얘기하는데, 핑클 시절에 잘생긴 남자 가수들 보고 싶을 땐 커피 한 잔 뽑는 척하면서 마음에 드는 친구가 지나가길 바란 적이 있었어. 하루에 다섯 잔 마신 적도 있었다. 솔로 데뷔하고는 많이 부딪혔어. 난 계속 벗으려고 하고 넌 자꾸 가리려고 하고. 넌 참 보수적인 친구였어.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더 '날라리'가 됐을 텐데 고맙다. 핑클로 활동하며 네 명일 때도 혼자일 때도 커다란 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걸어오던 모든 날과 모든 길들이 나에겐 레드카펫이었다. 더 친하게 지내자. 반갑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