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에서 서태지까지… 73년생 한동훈 '여의도 사투리' 탈피할까

입력
2023.12.31 07:00
[한동훈 국힘 비대위원장 화법 화제] 
장관 땐 직설 화법으로 국회서 설전
"검사 출신 영향" "사냥하듯 공격" 
루쉰·처칠 등 인용·'동료시민' 언급   
"엘리트 이미지" VS "인형극 느낌"
'젊은 보수' VS '진보 운동권' 대비

1973년생으로 50세에 정치에 뛰어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남다른 화법이 대중의 시선을 끌고 있다. 26일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그는 민주당을 겨냥해 '운동권' '숙주' '개딸전체주의' '청산대상' 등 공격적인 표현을 내뱉으면서도 고전과 명언을 능수능란하게 인용해 구사했다. "여의도 사투리가 아닌 5,000만 국민의 문법을 쓰겠다"고 공언한 그의 화법에 담긴 의미와 파급력을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직설 화법'으로 국회서 설전

한 위원장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특징이다.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지난해 4월 13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민주당이 추진했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검찰은 나쁜 놈들만 잘 잡으면 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틀 뒤 같은 질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검찰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범죄자뿐"이라며 "지난 5년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명분 없는 야반도주극까지 벌여야 하는지 국민들께서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민주당을 직격했다.

법무부 장관 시절인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특검' 도입 주장에 "수사받는 당사자가 쇼핑하듯 수사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는 적어도 민주국가 중에는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9월 단식 중인 이 대표 구속영장 청구를 두고 "수사받던 피의자가 단식하거나 자해한다고 해서 사법 시스템이 정지되는 선례가 만들어지면 안 된다. 그럼 앞으로 잡범들도 다 이렇게 할 것"이라고 거칠게 공격했다. 야당 대표를 잡범에 비유해 논란이 되자 "이재명 의원을 잡범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면서 "중대범죄 혐의가 많은 중대범죄 혐의자지, 잡범이 아니다"라고 받아쳤다.

야당 의원과 설전도 유명하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10월 국회에서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하자 "저는 법무부 장관직을 포함해서 앞으로 어떤 공직이라든지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뭐 거시겠느냐"고 응수했다. 지난 2월 국회에서 정청래 의원이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도 10년도 지난 거라 조사 안 하시는 거냐"고 추궁하자 "지난 정부에서 고발하신 것이고 민주당의 선택이다. 왜 그때 기소 안 하셨나"라고 되받았다. 정 의원이 "머리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텐데 묻는 말 중심으로 핵심을 답하라"는 질책에도 "묻는 말이 이상하니까 이렇게 말씀드린다"고 맞받았다. 당시 의원 질의를 질문으로 받아치는 '반문 화법'을 풍자한 웹툰까지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한 위원장 직설 화법이 '공세적 방어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정치평론가인 이종훈 명지대 연구교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세적 방어 전략을 취하고 있다"며 "단어 하나까지 선택해 정무적으로 나름 잘 설계된 발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일 정치평론가는 "막말이나 인신공격성 발언이 아닌 치밀하게 의도해 공격하는 화법"이라며 "일종의 사냥을 하는 것처럼 공격을 가하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상대 태도나 말투 등을 트집 잡아 공격하는 기성 정치인과도 차별화를 꾀한다.

출신 배경이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판사나 검사 출신들이 핵심을 잘 찍어낸다"며 "검사로 생활하면서 몸에 밴 것들이 정치 언어를 타고 강하게 표출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멜빌의 '모비딕', 처칠의 항전 연설도 차용

한 위원장은 동서양 고전과 명언을 자주 차용한다. 법무부 장관이었던 지난해 8월 신임 검사들에게 미국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는 구절을 들어 소신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지난 5월 신임 검사 임관식에서도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상식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라는 명언을 가져와 "일하다 보면 무엇이 상식인지부터 시작해 상식적 결정을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게 된다"며 "비법은 저도 아직 모르지만 많이 읽고 노력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했다.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19일 국회에 출석하면서 "세상 모든 길은 처음에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며 중국 대문호 루쉰의 소설 '고향'의 한 대목을 인용해 정치경험 부족을 극복하겠다고 밝혔다.

얼마 후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한 '공포는 반응이고 용기는 결심이다'라는 말을 차용해 "이재명 민주당의 폭주를 막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낄 만하다. 저는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또 처칠 총리가 1940년 의회 연설에서 나치에 대한 항전을 촉구하며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이며,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우고,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는 말도 가져와 "우리는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운동권 특권 세력과 싸울 거다. 호남에서, 영남에서, 충청에서, 강원에서, 제주에서, 경기에서, 서울에서 싸울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우리 모두가 바로 그 사람들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라며 그가 대학 시절 즐겨 듣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곡 '환상 속의 그대(1992년)' 가사를 각색했다.

서양 고전이나 명연설을 인용하는 화법은 젊은 강남 엘리트 이미지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장성호 전 건국대 행정대학원장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기존의 정치 문법과는 다른 패턴"이라며 "과거에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에 갖춰졌다면 새로운 세대는 실용주의이고, 한 위원장은 그걸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종훈 교수는 "유명인의 말이라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말은 금방 이해가 되지만, 현학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건 대중 정치인으로서 좋지 않다"며 "지금까지는 메시지가 제한적으로 노출되면서 관심을 끌었는데 앞으로 비슷한 화법이 반복되면 싫증 내는 국민도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동훈, 5,000만 국민 문법 구사할까

직설과 인용을 넘나드는 그의 화법은 기존 정치인과 차별화해 대중의 공감을 살 수 있을까.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두루뭉술하고 정형화된 기존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에게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면서 "한 위원장은 계속해서 비정치적인 화법과 행보, 본인만의 스타일로 승부하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X세대(1965년~1979년생)인 한 위원장 화법은 야권 주축인 86운동권 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와 차별화하는 효과도 예상된다. 엄 소장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차용한 것은 운동권 세대에서 X세대로 세대교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의도다"라며 "한 위원장이 정치권에 입문하자마자 '영 라이트(Young right·젋은 보수)'와 '올드 레프트(Old left·기성 진보)' 대비 효과를 누리려는 것"이라고 봤다.

반면 이종훈 교수는 "스스로 국민 눈높이에 맞춰 얘기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지금까지 발언들은 대부분 인형극을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게 될 때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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