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벽’이 또 하나 무너졌다. ‘축구 종가’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성 주심이 탄생했다. 남성들만의 리그라는 편견에 옐로카드를 꺼내 든 이는 14년 차 베테랑 심판 리베카 웰치다. 웰치는 24일 풀럼-번리전 주심을 맡았는데, EPL과 이전 잉글리시 풋볼 리그(1888년 창설) 시절까지 더하면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 135년 역사상 여성이 주심을 맡은 건 처음이었다.
웰치는 축구를 사랑하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판정에 불평을 했는데 “그렇게 쉬워 보이면 네가 해 보던가”라고 맞받아친 한 심판의 말을 덜컥 받아들였다고 한다. “축구 규칙을 더 자세히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그는 5경기 만에 심판의 매력에 빠졌다. 회사와 심판 일을 병행하며 경력을 쌓은 웰치는 전업 심판으로 진로를 바꾼 후 본격적으로 ‘유리천장 깨기’를 시작했다. 2021년 잉글랜드 2부 리그인 EFL 챔피언십, 지난해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의 첫 여성 주심에 이어 마침내 EPL에서 새 역사를 썼다.
웰치는 강고한 스포츠계의 성차별 장벽을 깬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EPL에 성차별 장벽이 완전하게 깨졌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주심과 선심, 대기심을 모두 포함해 여성 심판은 웰치가 유일하고, 지금도 EPL에는 여성 지도자(감독·코치)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세한 균열이 생긴 정도다.
대부분의 스포츠는 ‘남녀유별’이다. 남녀의 평균적인 신체능력 차이 때문에 맞대결은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국내외를 보더라도 그 어떤 분야보다 스포츠계의 ‘유리천장’은 높다. 종목과 프로, 아마추어를 불문하고 남성 팀은 물론, 여성 팀도 감독은 대부분 남자다. 가뭄에 콩 나듯 여성 감독이 부임해도 단명하기 일쑤다. 성적이 날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여자 감독이라서’라는 편견이 팽배해 있다.
스포츠 관련 기구도 여성 고위직은 많지 않다. 대한체육회 여성 임원은 전체 50명 중 11명(22%)뿐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권고 기준인 30%에 한참 부족하다.
올림픽조차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들은 1984년 전까지는 마라톤을 뛰지도 못했다. 1896년 1회 대회 때부터 정식 종목이었던 레슬링은 2004년까지 ‘금녀’의 영역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올림픽 복싱 링 위에선 여성들을 볼 수 없었다. “여성은 약하다” “여성은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이 편견을 깨고 발을 들여놓은 종목에도 여전히 ‘기회의 제한’은 도사리고 있다. 수영과 사이클 등 경기 구간이 남성보다 짧은 종목이 다수 존재한다. 여성 종목 메달 수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신체적 역량과 관계없이 경쟁의 폭에 선을 그을 때 여성 선수들은 벽을 느낀다.
지금까지 우리 스포츠 분야에서 여성의 업적과 성과는 찬란했다. 다만 우리 사회가 그걸 간과했을 뿐이다. 여성 차별이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스포츠에서만큼은 벽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사회가 스포츠에 기대하는 것은 분명하다. 단순히 신체적인 건강만이 아닌 개인과 사회의 심리적인 건강을 이끌어 주길 원하는 것이다. 능력이 아닌 성별이나 인종, 출신, 재력 등의 이유로 그 일원이 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스포츠라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웰치와 같은 이들이 뚫어 놓은 미세한 균열들이 모여 스포츠계 ‘차별의 벽’이 하루빨리 무너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