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자들의 정치

입력
2023.12.27 18:00
26면
여야 전통 주류 아닌 윤석열·이재명
총선 공천권 앞세워 '자기 당 만들기'
당 장악보다 가치 앞세워 중도 확장을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내년 4월 총선은 여야 모두에 절체절명의 승부처다. 적대적 진영 정치가 횡행하는 상황에선 지난 대선의 '윤석열 대 이재명' 구도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체제 출범으로 '한동훈 대 이재명' 구도로 바뀌었다는 시각도 있지만, '정부 심판이냐, 거대야당 심판이냐'라는 본질엔 변함이 없다.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을 내건 한 비대위원장 취임사로 더 분명해졌다.

당장 사생결단에 나설 듯하면서도 총선 승리에 대한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야가 묘하게 닮았다. 정책 개발이나 인재 발굴은 뒷전이고 국민의힘을 '윤석열당'으로, 더불어민주당을 '이재명당'으로 만드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총선이란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병사 단련보다 장수 보호를 위한 진지 구축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모두 여야의 주류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역설이다.

국민의힘의 전통적인 주류는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영남 세력과 엘리트 관료 세력이다. 윤 대통령은 보수에서 최근 배출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을 이끈 당사자다. 문재인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다 검찰총장 재직 시 '조국 사태'를 계기로 민주당 정권에 맞서는 상징적 인물로 각인됐고, 마땅한 대선주자가 없던 국민의힘의 '필승 카드'로 영입된 케이스다.

당내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취임 초부터 친정체제 구축에 나섰다.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인 이준석을 내쫓은 자리에 친윤석열계 김기현을 앉혔으며,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최측근인 한동훈을 비대위원장으로 차출했다. 그 사이 여당은 무기력과 수직적 당정관계에 익숙해졌다. 최근 당내 '김건희 특검법' 대응 논의가 하루아침에 대통령실의 '수용 불가' 입장으로 정리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총선 불출마까지 선언한 한 위원장은 쓰임이 다한 친윤과 당내 기득권인 영남 의원들을 쇄신 대상으로 지목할 명분을 확보했다. 그 빈자리를 검찰이나 대통령실 참모 출신 '찐윤'으로 채워 주류 재편의 마침표를 찍을지는 한동훈 비대위에 달렸다.

이 대표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민주당 전통적인 주류인 호남, 86세대 운동권 출신이 아니다. 2007년 당시 대선후보(정동영) 캠프 활동과 당 부대변인으로 재직한 게 여의도 경력의 전부다. 지역행정(성남시장 8년, 경기지사 2년) 경험만으로 대선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김경수·안희정·조국 등 차기 주자들이 사법 처리 등으로 레이스 출발선에 서지 못한 측면이 크다.

지난해 8월 당대표 취임 이후 강경파 초선과 강성 당원을 앞세워 당을 장악했다. 이 대표의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은 빈말이 됐고, 체포동의안 가결 내홍 당시 지도부를 친이재명계 일색으로 채워 공천권을 독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사법리스크가 총선까지 실재해도 '통합 비대위' 요구에 꿈쩍하지 않는다. 통합을 명분으로 공천권을 나눌수록 우군이 될 원외 친명의 원내 진입 통로는 좁아지기 때문이다. 당내 비명 반발에도 당대표 선거에서 권리당원 표 비중을 높이는 내용의 당헌을 개정한 것도 차기 당권을 친명이 차지하기 위한 포석이다.

정치에서 공천권을 확보해 당 주류로 거듭나려는 시도 자체는 당연하다. 문제는 별다른 명분이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야가 주장하는 '거대 야당의 폭주 저지', '검찰 독재의 폭주 저지' 등 네거티브만으로 중도 확장은 난망하다. 여야 모두 총선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대비한 '자기 당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이처럼 뻔히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일 것이다.

김회경 논설위원 hermes@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