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세이들의 모토 '진주만을 기억하라'

입력
2024.01.0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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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영옥과 니세이부대- 2


수용시설에 갇힌 12만여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철조망 두른 수용소 캠프에서 무장 군인들의 감시하에 정부 배급품으로 생활해야 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청소년들은 수용소 간이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고, 성인에게는 월 12~19달러 임금의 캠프 시설 개보수 등 일자리가 제공됐다. 나치 유대인 게토에 비하자면 훨씬 나은 여건이긴 했지만 그 역시 전쟁 히스테리와 인종 편견에 근거한 반인권적 국가폭력이었다. 미국 정부는 최근까지 여러 차례 일본 정부와 일본계 미국인, 일본인들에게 공식 사과했고 생존자 배상과 더불어 재발 방지를 위한 공공교육 기금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1944년 12월 백악관 행정명령 중단 선언으로 그들은 풀려났다.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집과 직장을 잃은 이들은 재정착센터 등 임시 거주시설을 거쳐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미국 사회에 터를 잡아야 했고, 사회적 편견에도 시달려야 했다. 미국 정부는 전후 8년 뒤인 53년에야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허용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시민 자격’을 입증한 니세이 부대원들은 달랐다. 진주만 공습의 상흔을 상징하듯 ‘퍼플하트 대대’라 불린 니세이부대의 모토는 ‘진주만을 기억하라’였다고 한다. 그들은 전후에도 군대에 남거나 당당한 예비역으로서 백인 주류 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전후 일본계 미국인은 하와이에서 태어나 미 육사를 졸업한 에릭 신세키(Eric Shinseki, 1942~)와 미 해군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전 주한 미 대사 해리 해리스(Herry Harris Jr., 1956~) 등 두 명의 4성 장군을 배출했다. 김영옥은 72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말년까지 LA지역 한인 및 아시아계 이민자단체 등과 함께 다양한 지역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한국계 미국인 장성은 현재 육군 공군 해병대 등에서 잇따라 배출되고 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