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적힌 가자지구 병원도 폭격··· 순박했던 그곳 사람들 생각나”

입력
2023.12.27 16:00
24면
[이진희의 동행]
‘국경없는의사회’ 김지민 마취과 전문의
50세 넘어 팔레스타인 등 7차례 파견활동
“이스라엘 폭격으로 현지 병원 지인 사망”
“희생이 아니고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죠”

누군가는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는 사람을 살린다. 전쟁터나 분쟁지역은 압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곳인데, 그곳에서도 목숨을 살리려는 안간힘은 시도된다.

1971년 프랑스 의사들과 의학 전문 언론인들이 설립, 세계적인 조직이 된 ‘국경없는의사회(Médecins Sans Frontières·MSF)’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총 7차례 해외 파견을 나간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김지민씨를 지난 13일 만나 MSF 활동에 대해 들어봤다.

“현지 도착하면 2주 동안은 ‘내가 미쳤지, 여기 왜 또 왔지?’ 해요. 너무 힘들어서요. 한국 돌아오면 한 달은 너무 편하고 좋은 거예요. 그런데 한 달 지나면 또 ‘언제 나가지’ 생각하게 돼요. 저만 아니라 다른 활동가 선생님들 만나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너무 힘들어 파견 3개월간 10kg이 빠지고, 만약을 대비해 생명보험까지 가입해야 하는 MSF 활동. 그럼에도 그는 강조했다.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 자기 좋아서 하는 거지요.”


가자에서 목숨 잃은 현지인 동료의 소식

올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2018년 두 차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파견을 갔다. “(전쟁으로)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그곳 사람들이 정말 좋거든요. 저희를 고마워하고, 정말 순박해요. 우리나라 1960, 70년대에 머물렀다고 생각하면 비슷해요. 아이들도 많고 가정적이고요.”

이스라엘의 가자 폭격이 시작되자 함께 일했던 현지인 직원들이 걱정됐다. “페이스북이나 메신저로 서로 연락을 하거든요. ‘괜찮냐’고 보내놓았는데, 아무도 답이 안 오는 거예요. ‘괜찮냐’고 보내는 것도 너무 무서워서 바로 못 보냈어요. 일주일 만에 답들이 왔지만, 얼굴을 알고 함께 일했던 현지 의사, 간호사 중에 사망한 사람들이 있어요. 마음이 아프죠. MSF 각 지부에서 가자지구 폭격을 중지하라는 사회적 무브먼트(운동)를 하고 있어요.”

가자지구는 MSF 한국 활동가들과 인연이 깊다. MSF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지역으로 나눠서 파견을 가는데, 한국인은 대부분 영어 사용이 가능한 지역으로 가며 그중 대표적인 곳이 가자이다.

이전 MSF 홍보 영상을 보면, 김씨는 그때의 추억을 회고한다. “수술방 안에 제가 이름을 써놓고 왔거든요. 다음에 온 한국인 간호사가 그 밑에 또 이름을 써놓은 거예요. 두 번째 파견 나갔을 때 가자의 남자 간호사가 ‘여기 봐라, 네 이름 밑에 다른 사람이 이름을 또 써놓고 나갔다’고···. 한국 파견인 세 명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놓은 기둥이 있었어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같이 해나가는 일인 것 같아요.”

김씨는 참담한 소식을 전했다. “시파 병원인데요. 그곳도 (이번에) 폭격당했어요.”


카메룬 반군이 총구를 겨눌 때

활동가들은 파견을 나갈 때, 생명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제1, 제2, 제3 수혜자를 다 쓰고, 납치됐을 때를 가정해서 연락할 수 있는 가족들도 쓰게 돼 있다. “무섭지 않은지” 묻자 “인지된 위험은 훈련을 통해서 미연에 방지가 가능하고, 인지 못하는 위험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MSF 활동가들은 위험을 줄이기 위해 많은 규칙을 따라야 한다. 조깅을 해도 혼자는 안 되고 두 명이서 한다. “항상 MSF 옷을 입고 다니고요. 저희 차에는 ‘총이 없다’는 표시가 있어요. 제가 갔던 가장 위험한 지역은 카메룬이었는데 불시검문이 빈번했고, 내려 엎드리라고 하는 게 많았어요. 그대로 따라야 해요. 반군도 제1반군, 제2반군이래요. 긴장도가 높은 상태라서 재채기만 해도 총을 쏴요. 병원에도 총 들고 들어오고요. 무조건 말을 따라야 해요. 분쟁이 너무 심하면 숙소에 열흘 동안 갇혀서 나가지 못할 때도 있어요.”

가자지구는 이번에 심각한 사태를 겪었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장벽 주변에는 끊임없이 분쟁과 싸움이 있어도 MSF 등 NGO단체가 있는 곳은 원래 폭격이 금지된다. “병원이 있는 후방 쪽은 저희 필드장(행정 업무를 하는 수장)이 소통을 해서 연합군 쪽에 GPS 좌표를 다 줘요. 그 좌표는 연합군이나 이스라엘도 가지고 있어서 드론 폭격도 하지 않아요.”

그래도 언제나 감시를 느꼈다. “저녁에 (연합군·이스라엘군의) 드론이 위에서 떠서 전체적으로 한 바퀴 돌고 가요. 휙휙 로켓포 날아가는 소리도 들렸고요.

이번 이스라엘의 병원 공격에서 알 수 있듯이 분쟁지역에서의 큰 위협은 반군이 아니라고 했다. “반군은 큰 피해는 못 입혀요. 소총으로 쏴봤자 얼마나 피해를 입히겠어요. 예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연합군이 MSF 병원을 때렸어요. 저희 프레지던트(MSF 수장)가 연합군과 미국에 항의를 했더니, 미국이 ‘오폭이었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애초 공격하려던 데가 어딘지를 물으니, 얘기를 안 해서 국제 진상조사 이야기까지 나왔지요.”

반군들도 예전엔 NGO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공격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씨는 “그래야 서방 뉴스에 나오고 협상카드가 되기 때문”이라며 “현지인 100명, 200명, 500명이 죽어도 뉴스 한 줄 안 나오니까요”라고 말했다. “이번에 하마스가 한 것도 똑같은 거죠(같은 이치죠). 인질을 잡고 협상카드를 갖기 위해서죠.”


써선 안 되는 산탄에 맞은 환자들

외과·산부인과·마취과는 파견 기간이 2~4개월 정도이다. 그 이상은 MSF에서도 권장하지 않는다. “외과 계열은 보통 24시간 콜을 커버해야 해요. 나이지리아에 갔을 때 일주일 내내 24시간 콜을 3개월 했는데 몸무게가 10kg이 빠졌어요. 지난해 남수단에 두 달 동안 파견 갔을 때도 힘들었어요.”

반면 내과와 소아과는 가장 짧은 게 6개월이라고 한다. 외과와 달리 순번을 정해서 진료가 가능하고, 치료의 연속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MSF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의사들을 배치하는데, 김씨가 가자지구에 배치된 것은 화상 환자가 많아서였다. “아기 화상 환자가 많았어요. 전기 공급이 하루 몇 번밖에 안 돼요. 아이들이 콘센트에 젓가락 넣다가 전기화상도 당하고요. 가정마다 5, 6명 되는 애들을 엄마가 제대로 못 돌보니 티팟(찻주전자)이 엎어져 화상을 많이 당해요. 이슬람 문화가 뜨거운 차를 많이 마시거든요. 그래서 가자에서 MSF가 성형외과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처음에 화상 환자 때문에 파견됐는데, 총상 환자들이 늘어났다. 당시 2018년 팔레스타인의 ‘위대한 귀환 행진’ 시위가 시작됐다. ‘이스라엘이 강제 점거하고 있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위는 매주 금요일 이스라엘 접경지역에서 벌어졌다. 유엔은 “대부분 비무장 평화시위였는데, 이스라엘군은 과도한 무력을 사용했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그해 3월 30일(시위 시작일) 접경지에서 (양측이) 아주 크게 붙었고, 이스라엘군은 산탄(散彈)을 썼어요. 한번 쏘면 여러 군데 맞는 거죠. 국제 협약으로 못 쓰게 돼 있어요. 그런데 중점적으로 허리 아래쪽으로 쏘는 거예요. 주로 10, 20대 남자애들이 부상당하고요. 절단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그걸 견딜 수 없어서 억지로 붙들고 있다가 점점 감염이 되고,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더 큰 절단을 하고 그랬어요. 처음 화상 환자를 보다가 3월 말 총상 환자가 너무 늘어나 화상 치료를 멈춰야 했어요. 원래 가자지역에 저희 활동가가 5명밖에 없었는데, 두 번째 파견 나갔을 때는 30명이 넘게 있었어요.”

MSF 활동, 국내 코로나 대처에도 도움

열악하지만 파견지에도 대부분 의대를 포함해 의사 양성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병원이 없으면 지을 때도 있지만, 현지 병원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해서 그 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한다. 활동가들은 현지 의료진 등을 교육하는 게 주요 임무 중에 하나이다. 김씨는 “수술방 청소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오염에 대한 교육을 시킬 정도로 교육이 반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지 의사가 고집을 피우면 논문을 뽑아 근거를 제시하며 가르쳐야 할 정도로 힘들 때도 있다. 의사가 없다면 간호 인력을 가르친다. 하지만 배우는 면도 많다. “그쪽의 풍토는 현지 의사들이 가장 잘 알아요. 무조건 가르친다는 생각을 벗어나야 돼요. 말라리아 환자는 현지 병원 의사가 가장 잘 알지요.”

이런 경험들은 국내에도 도움이 된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민간지원센터 코로나병동,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일했다. “MSF는 감염 교육을 기본적으로 하거든요. 에볼라나 결핵부터 에이즈, 수인성 감염까지 담당해야 하니까요. 감염 관련 원칙을 많이 알고 있어서 쓸데없는 두려움이 적어요. 코로나가 터졌을 때 의사들조차 병원 지원하는 걸 꺼렸어요. 굳이 그럴 이유가 없거든요. MSF 활동하는 많은 선생님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일도 같이 하세요. 국립의료원에서 인의협과 MOU를 맺어서 코로나 격리병동을 운영했어요.”

지천명이 되어 4번 도전 끝에 찾은 꿈

그는 2014년 MSF에 지원해서, 2015년 1월 첫 파견을 나갔다. 당시엔 일본 사무소로 인터뷰를 가야 했는데, 2시간에 이르는 영어 인터뷰 통과가 어려워서 4번째 인터뷰 만에 합격했다. “영어 회화 능력을 키워서 두 달 후, 두 달 후 이런 식으로 다시 인터뷰를 한 거죠.”

3번의 실패에도 도전할 만큼 절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워커홀릭처럼 일만 열심히 했어요. 이거(의사)밖에 안 해봤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요.

그러다 고혈압 등의 진단을 받았고 불현듯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런 순간이 오면 ‘뭐가 가장 후회스러울까’ 생각했어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의사를 안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렇게 50세 때 병원에 사표를 냈고, 의대생 시절 막연하게 품고 있던 의료봉사의 꿈이 떠올랐다. 1년을 준비해 MSF 인터뷰에 응해 지금에 이르게 됐다.

MSF 한국사무소는 2012년 설립됐는데, 한국인 의사들은 그 이전부터 해외 지부를 통해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정확한 활동인원은 집계되지 않는다. “국적을 안 따져요. 외국은 국적이 2, 3개인 사람도 많잖아요. 일본에 비해서는 늦었지만, 한국의 성장 속도에 비해 참여가 늦은 것은 아니라고 봐요.”

MSF는 민주적으로 운영되며 지역별 대표 등의 투표로 정책을 결정한다. “예를 들면, 일본사무소에서 의견을 내서 ‘실내 공간 흡연 금지’ 정책이 몇 년 전 채택됐어요.” 활동가들은 출신국가나 파견국가 중 높은 쪽의 최저임금 정도를 받고 일하며 기간에 따라 조금씩 호봉이 올라간다. 의료진(의사·간호사)이 절반, 행정지원 업무 등을 하는 비의료진이 절반 정도이다. 활동가들의 안전을 위해 정부군·반군과 정보 교류를 하는 등의 막중한 임무를 맡는 필드장도 대부분 비의료 계통의 행정가들이다.


MSF 활동가이자 후원자

MSF 활동을 하려면 한국에서는 직장(병원)을 그만둬야 한다. 자리를 보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는 성형외과 등에서 프리랜서 의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해결한다. “일자리는 잘 생겨요. 나갔다 온 것(MSF 활동)에 좋게 봐주시는 선생님들이 많기 때문에요.” 요즘 의사들이 필수의료보다 돈이 되는 분야를 선호한다고 해도, 의사의 사명을 다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은 분명 널리 존재한다는 뜻이다.

의료계만 그런 건 아니다. “가족들이 걱정을 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죠. 오히려 자녀들과 대화가 많아진다고 해요. 산부인과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애들이 초등학생인데, 파견 가 있으면 훨씬 많은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카톡으로요. 아이들이 훨씬 자기 생활도 잘하고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거죠.”

그는 MSF를 알리기 위해 채용 설명회, 강연 등에 참여하는데 의사, 간호사 지망생들 중에서도 열망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요즘은 저희 때보다 더 힘들게 의대를 가고 부모가 등 떠밀어서 가기 때문에 진짜 원해서 의대를 간 애들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이거(MSF 활동)를 하려고 의대, 간호대 왔어요’ 하는 젊은 친구들도 있어요.”

김씨는 활동가이면서 MSF에 후원금을 내는 후원자이기도 하다. 많은 활동가가 그렇다고 한다. MSF 한국사무소(msf.or.kr)는 후원자와 활동가를 수시로 모집한다. 그는 MSF 유튜브 홍보 영상에서 이렇게 동참을 호소했다. “한 번 웃어주는 웃음, 고맙다는 말 한마디, 그게 가슴이 참 벅차요. 그래서 행복해요. 행복해서 나가는 거 같아요.

이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