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삼킬 불길이 치솟아 산하가 온통 잿더미 되어도/이 비석만은 홀로 남고 이 글만은 닳지 마소서." 당대의 문인 민지(閔漬)가 쓴 일연(一然) 비문의 마지막 구절이다. 비석을 세우기로는 1295년, 겁화(劫火) 속에도 의연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눈에 밟힌다. 몽골과의 전쟁을 치른 직후였다. 황룡사 구층 목탑이 하릴없이 타버린 전쟁터가 이 비석을 세운 인각사에서 멀지 않다. 그러니 잿더미라는 말이 어찌 한낱 비유일까.
비문은 앞면의 일연 일대기를 비롯해 뒷면의 건립기까지 무릇 3,500여 자의 긴 글이었다. 이를 모두 왕희지의 글씨에서 한 자 한 자 찾아내 모았다. 이른바 집자(集字) 비문이다. 그것을 오석(烏石)에 새겨 세우니 비석은 호사 그 자체였다. 분명 집자이건만, 마치 왕희지가 이 비문을 위해 써 준 것 같았다. 그래서 왕희지의 글씨를 일러 신필(神筆)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이 비석에 닥친 ‘화’는 세상 삼킬 불길이 아니라 신필을 탐내 두드리는 탁본의 방망이였다. 제 고장 중국에서 오는 사신조차 눈독 들이고, 전쟁하러 온 일본군도 진적(眞跡)을 탐냈다. 1760년경의 기록에는 인각사 불전 밑에 깨진 비석이 10여 개 뒹굴고 있다고 했다. 탁본 노역에 시달린 스님들이 더는 못 하겠다고 일부러 파손해 버렸다는 것이다. 신필이 화를 불러온 셈이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절집도 거의 무너지고 자취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1890년경의 기록은 어느 일족이 절터를 제 집안의 묫자리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이때는 삼국유사마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책이 되고 말았다.
비석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27년이었다. 그해 3월 최남선이 삼국유사를 일본에서 찾아와 소개했다. 그가 주간하던 월간지 '계명' 한 호를 다 턴 파격적인 편집이었다. 그러자 안진호라는 사람이 이를 보고 다른 월간지 '불교' 6월호에 '삼국유사의 출현을 보고 보각국존의 비석을 일언하노라'는 글을 실었다. ‘보각국존’은 일연의 시호이다. 아스라한 기억 속의 책이 나타나 반갑기도 했을 터. 안진호가 비석의 근황을 찾아 소개한바, 조각나 방치된 덩어리조차 안 보여 알아보니 아예 깨트려 벼루 만드는 데 써버렸다는 것이다. 고귀한 뜻을 실어 비석은 역사처럼 우뚝 섰으나, 넘어트리고 조각내고 깨트린 손길이 배신의 세월처럼 서글프다. 산하가 온통 잿더미 된들 홀로라도 남기 바랐건만.
인각사 마당 한쪽 비각 안에 파편만 남은 비석이 여윈 고목처럼 서 있다. 물건이야 때 되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사라져서 서글프기보다 맥락 없는 파괴가 무심해 아프다. 이것이 어찌 비석만의 일이겠는가. 피 흘려 세운 제도 또한 무지와 몽매 속에 무너지기 쉽다. 정녕 분발해야 할 새해가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