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선고 나는 날 애국가 부르겠다"... '서현역 흉기난동' 이후 국가는 없었다

입력
2023.12.24 07:00
['서현역 흉기난동' 사망 김혜빈 유족 인터뷰]
"국가 믿었는데... 딸 영영 잊힐까 두려워"
보험금 1억5,000만 원 거절... 소송할 것 
"피의자 최원종 심신미약 주장, 감형 노려"
"가해자 엄벌해 이상범죄 전환점 마련해야"

"학원 알바 다녀올게요."

올해 예술대학에 진학한 스무 살 외동딸이 남긴 명랑한 인사가 마지막이 될지 부모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딸은 일하던 미술학원 인근에서 시속 80㎞로 돌진하는 차에 치였다. 딸은 잠시 편의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병원에서 찾은 딸은 두개골이 부서진 채 의식이 없었다. 그로부터 25일 후 딸은 숨을 거뒀다.

김혜빈(20)씨는 지난 8월 3일 오후 6시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에서 최원종(22)의 차량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같은 달 28일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김씨 등 2명이 숨지고, 최씨가 휘두른 흉기에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최씨는 살인, 살인미수, 살인예비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다음 달 4일 공판을 앞둔 김씨의 부모를 18일 만났다.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한 지 4개월이 넘었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분노했다. 김씨의 부모는 "그동안 아무 죄 없이 당한 일인 만큼 국가가 해결해줄 것이라 믿고 기다렸지만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곳은 없었다"며 "이대로 침묵하다간 우리 딸이 영영 잊힐 것 같아 두렵다"고 목소리를 냈다.

생업 포기하고 자책만... 외동딸 잃고 순식간에 무너진 삶

딸이 떠난 후 부모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딸이 저들 대신 떠났다는 생각에 집 밖을 나서기도 두려운 부모는 생업도 포기했다. 세 식구는 한 번도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을 만큼 돈독했다. 딸은 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려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설 만큼 책임감이 강했다. 부모 생일이나 기념일 등도 꼭꼭 챙기는 살가운 딸이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혜빈이는 엘리베이터에서 탯줄을 잘랐을 만큼 위험하고 급박하게 태어났지만, 살면서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 없이 건강했다"며 "그런데 처음 입원한 병원이 마지막이 됐다"고 흐느꼈다. 김씨의 어머니는 "딸을 떼어놓고 나니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자책도 남은 이들의 몫이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갔다면 딸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고 가슴을 쳤다. 김씨의 어머니도 "그 무렵 딸이 가고 싶어 했던 일본을 보냈더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숨죽여 울었다. 김씨가 일했던 학원 관계자는 "그날따라 평소보다 10분 일찍 일정을 진행하는 바람에 혜빈이가 원래 나가지 않았을 시간대에 나갔다"며 말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테러에 준하는 범죄'라던 윤 대통령, 말뿐이었다"


무고한 생명이 희생됐지만 국가는 없었다. 김씨의 어머니는 "사건 초반엔 대통령도 수사기관도 '테러에 준하는 범죄'라며 신속하고 엄정하게 대응하라고 했지만 이제 와 보니 말뿐이었다"며 "딸이 죽고 나서는 어디에서도 먼저 나서 도와주지 않았다"고 분노했다. 사건 이후 법무부는 유족지원금 700만 원(장례비 400만 원, 3개월 치 생계비 300만 원)과 심리치료 12회를 제공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유족 구조금이라며 최대 4,000만 원을 지급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딸이 죽었는데 목숨값을 따지는 부모가 어디 있나"라며 "딸을 죽인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이런 끔찍한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마련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부모는 최씨 측 자동차 보험사에서 나오는 사망보험금 1억5,000만 원도 받지 않기로 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사망보험금을 받으면 최씨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할 수 없다고 한다""민사 소송도 불사해 딸의 억울함을 풀어야지 1억5,000만 원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가해자 엄벌과 사회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김씨의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탄원서를 받는 것뿐이다. 김씨의 부모는 김씨의 대학 학생회 등을 통해 가해자의 엄벌을 촉구하는 탄원서 1,170장을 모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엄벌에 처해 이상범죄 전환점 마련해야”

김씨의 부모가 가장 우려하는 건 최씨의 심신미약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앞서 검찰은 △최씨가 상당한 학업능력과 가상화폐 투자와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을 가진 점, △범행 전에 ‘심신미약 감경’ 등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감형을 의도한 점 등으로 미뤄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이 판단을 온전히 받아들일지는 확신할 수 없다.

김씨의 어머니는 "(최씨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감형을 위해 대형 로펌 변호사를 선임하고 정신 감정을 받는데 우리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다"며 "재판에서 최씨의 심신미약이 인정돼 감형을 받을까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김씨의 부모는 "강력 범죄자의 연령대가 어려지고 '묻지마 범죄' 폭력성의 수위도 더 심각해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옛날 법리만 따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묻지마 범죄를 확실하게 단죄할 전환점이 우리 사회에도 생겨야 하고,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이 바로 그 전환점이 돼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들은 "(최씨) 사형 선고만이 딸이 억울함을 풀고 편히 쉴 수 있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라도 나왔으면 한다”며 “딸이 어릴 때 자장가로 애국가를 불러주면 잘 잤는데, 사형 선고가 나는 날을 맞는다면 애국가를 불러주고 싶다”고 울먹였다.

마지막으로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부모는 눈물을 닦아내고 말했다. 이들은 "재판부가 최원종을 용서하냐고 한 번이라도 물어봐주면 좋겠다"며 "그러면 '용서하지 않는다'고 답할 텐데. 딸을 만난다면 ‘최원종을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얘기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최은서 기자
원다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