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세계에 입문했던 건 1년 7개월 전 경제부로 발령 나면서다. 금융의 세계는 곧 신용의 세계였다. 믿을 만한 상대에겐 소정의 이자만 붙여서 돈을 빌려주지만 반대의 경우 내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리스크)만큼 이자를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 그것이 금융의 기본이라 이해했다. 그래서 사업 주체의 신용도를 보지도, 담보를 요구하지도 않고, 오직 사업의 미래 실적만을 '믿고' 거액을 빌려주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같은 금융 기법은 초심자인 내게 가히 '센세이션'했다.
신용의 회복 탄력성 또한 신선했다. 가령 지방자치단체처럼 견실한 이가 돈을 갚지 못하는 뜻밖의 부실이 발생했을 때, '다른 이들도 못 갚을 것'이라는 불신이 들불처럼 번지기는 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이 등판해 불신으로 돈줄이 마른 곳에 수십조 원의 지원을 퍼붓거나 고위 인사가 부실 우려 금융사에 공개적으로 돈을 맡기며 '이제 괜찮다'고 다독이면 신용 프로세스는 차츰 재작동했다. 이곳에서의 신뢰는 일반 사회에서보다 훨씬 단단하고 뿌리 깊은 가치였다.
무결한 세상은 없듯, 이곳에도 '외딴섬'은 존재한다. 공매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곳, 주식시장이 그렇다. 신뢰의 회복 탄력성은커녕 오래된 불신으로 소통이 굳어버린 곳. '공매도는 절대 악'이라는 강성 개인투자자의 확증 편향 앞에선 '공매도는 과대평가된 주식 가격을 조정한다'는 설명은 일개 메아리로 돌아오는 곳.
최근엔 공매도 모니터링 시스템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서(대차거래) 판 다음 주가가 떨어지면 싼값에 되사 차익을 얻는 기법이다. 보유 주식이 없는데도 매도 주문을 넣고 결제일(주문일 이틀 후) 전에 재빨리 주식을 빌려서 메꾸는 무차입 공매도는 불법이다. 따라서 불법 공매도 감시의 핵심은 대차거래 여부를 전산으로 실시간 파악하는 것이다.
관계 기관은 현실적인 이유로 "어렵다"고 항변하고 개인투자자는 "의지의 문제"라고 반박한다. 현실적인 이유란 이러하다. ①주문과 대금 결제의 시차(2일), 주문과 잔고 관리 업체의 분리 때문에 제3자가 대차거래 여부를 즉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②대차거래 플랫폼을 만들어도 장외거래는 누락될 것이고 플랫폼 이용을 강제하면 독점 이슈가 불거질 수 있다. 한국거래소는 접점을 찾아보겠다며 연말 토론회까지 열었지만 개인투자자들의 반응은 이랬다. "지금 하신 말씀은 윤석열 대통령님 말씀을 100% 역으로 부정하시는 겁니다."
뿌리 깊은 불신은 누가 만든 것일까. 답 역시 같은 토론회에서 나왔다. "2018년에도 당국은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이후 '도저히 안 된다, 무리'라고 했으면 되는데, '천문학적 비용과 시스템 과부하'를 번복 사유로 들었다. 할 수 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시장이 받아들이면서 신뢰가 무너졌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의 말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 불신의 굴레를 만든다는 얘기다. "미국에선 대차거래 플랫폼 이용률이 70%, 80%라고 하니 그 정도 선에서 맞춰가지 않겠어요." 투자업계 관계자 전망이다. "올해 안에 될까요" 물었더니 멋쩍은 웃음만 짓는다. 비단 공매도뿐일까. 불신을 잉태하는 말들은 오늘도 쏟아지고 있는데. 선거가 코앞이란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