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하와이의 푸른 야자수 잎 뒤엔 잿더미...마우이 주민 "여행 꼭 와 주세요"

입력
2024.01.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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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희망의 싹 틔우다]
지난해 8월 화재 이후 한국 언론 첫 현지 취재
전 재산 잃은 청년 "부엌 있는 집에 살고 싶어"
화마에 전 재산 빼앗겨 트라우마
마우이 주민들 "여행 와달라" 호소



큰 키에 깡마른 체형, 어두운 표정의 청년이 음식을 내왔다. 추천 메뉴를 묻자 미리 외워둔 소개를 한숨에 읊던 그였다. 미소 짓는 법을 잊은 듯한 이 청년은 손님과 눈을 마주치는 대신 식탁 한쪽 끝이나 창밖을 바라봤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주(州) 마우이섬 서부 라하이나(Lāhainā)에서 영업 중인 식당은 손에 꼽혔다. 구글 지도에 '영업 중'으로 표시된 곳도 막상 가면 십중팔구 불이 꺼져있었다. 도로가 봉쇄된 탓에 두어 시간 우회도로를 타고 헤매다 오후가 돼서야 한 골프클럽 안 식당을 찾았다. 홀은 절반을 채우지 못했다. 관광객이 크게 준 탓이다. 직원들은 라운딩을 마치고 들른 이들 손님을 밝은 표정으로 맞았지만 던컨(27)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잠시 뒤 한국에서 화재 복구 상황을 취재하러 왔다는 기자에게 다가온 그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며 먼저 말을 건넸다. 하와이 당국은 기자에게 피해 지역 주민의 심리적 고통을 감안해 무리한 인터뷰나 참혹한 모습을 찍는 건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던컨은 "나는 화재로 집과 차를 잃고 길 건너 리조트에 산다"며 "마우이섬이 이재민에게 방을 제공했는데 관광객들이 늘면 리조트들도 돈을 벌어야 하니 우리는 언제 쫓겨날지 몰라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그의 소원은 부엌과 세탁기가 갖춰진 곳에서 사는 것. 화재의 악몽을 잊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출근한다는 던컨은 가뜩이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관광객이 줄었는데 마우이 화재까지 겹치며 손님이 40%나 줄어 식당 사정이 좋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이 섬의 사정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그곳에 여행을 가는 건 이재민을 생각할 때 옳은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며 "심지어 여기 오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타버린 나무, 새로 심은 나무로 가려


하와이주(州) 여러 섬 중 오아후와 함께 한국인이 많이 찾는 마우이. 지난해 8월 8일 이 섬의 서부 라하이나를 휩쓴 산불은 10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이 재난은 미국에선 1918년 미네소타주 산불(453명 사망) 이후 최악의 화재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110일이 흐른 지난달 7일. 기자는 하와이 대니얼 K. 이노우에 국제공항에서 주내 항공편을 타고 한 시간 뒤 마우이 카훌루이 공항에 닿았다. 화재 이후 라하이나를 찾은 건 한국 언론 중 처음이라는 게 하와이관광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구글 지도로는 약 40분 거리였지만 복구 작업으로 꽤 많은 곳이 봉쇄된 까닭에 두 시간 걸렸다. 하와이관광청 등은 관광객에게 "불에 탄 지역 대신 동쪽을 여행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마을은 봉쇄…우회로 타자 40분 거리 두 시간 걸려



카훌루이 공항에서 중남부 케알리아 연못을 들른 뒤 북서쪽으로 난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산불이 삽시간에 번지며 피해를 입은 라하이나 인근을 살필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을 근처는 어찌된 일인지 녹색으로 찬란했다. 도로 양옆으로 키 큰 나무들이 푸른 야자수 잎을 바람에 나부끼며 서 있었다. 수수께끼는 잠시 뒤 풀렸다. 조금 더 가니 공터에 포크레인과 트럭들이 서 있었다. 곁에는 새로 심을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건강한 나무를 심는 중이었다.

멀리서 본 라하이나는 처참했다. 가림막 위로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집들은 화마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외신에 따르면 라하이나 마을은 지난달 11일 이 지역 주민들과 통행권을 지닌 부동산 소유주에게 화재 이후 처음 제한적으로 개방됐다.



"아파도… 살려면 관광객 맞아야"


복구가 안 된 마우이섬을 서둘러 개방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한다는 비판에 대해 기자가 만난 이곳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제발 여행을 와주세요."

뜻밖의 답변 뒤에 따라붙은 그들의 설명은 이랬다. "훼손된 자연은 인간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살릴 수 없다. 이 마을이 화재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3년이 필요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의 트라우마가 옅어지는 데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그때까지 일상을 멈출 순 없다." 여전히 회복 중인 이 섬을 찾아와 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은 살려 달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복구에 동참해 달라는 호소였다. 인근 주자창에서 만난 머릴로는 "관광 산업이 다시 살아나야 주민들이 재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4대 마라톤 '호놀룰루 마라톤'도 관광객 뚝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히며 하와이를 찾는 관광객은 쪼그라들었고 항공과 숙박, 식당, 레저스포츠 등 섬을 지탱하던 산업들이 멈췄다. 하와이관광청에 따르면 2019년 1,038만6,672명에 달했던 하와이 방문객은 코로나19가 확산한 이듬해 26.1% 수준인 270만8,258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후 다시 국가 간 이동이 늘자 2021년 677만7,761명이 하와이를 찾으며 관광산업은 살아나는 듯했다.

같은 시기 하와이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들도 감소했다. 2019년 약 23만 명이었던 한국인 방문객은 2021년 95.3% 줄어든 1만 명대로 곤두박질쳤다. 지난해 9월 기준 약 12만 명이 다녀가며 팬데믹 이전과 비교해 절반 수준을 웃돌았다.




이런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준 게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호놀룰루마라톤이다. 마라톤 집행위원회의 크리스는 "40년 넘게 행사를 하면서 최근 3년만큼 걱정 많았던 적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동안 마라톤 참가자들 대다수가 일본에서 왔는데 코로나19 이후 ①팬데믹과 ②마우이 화재에 ③역대급 엔저(엔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참여율이 떨어져서다.

집행위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 3만 명 수준이던 마라톤 참가자(신청 기준)는 팬데믹 이후 약 2만 명으로 줄었다. 절반가량 차지했던 일본인들은 같은 시기 약 1만5,000명에서 약 9,000명으로 덩달아 감소했다.



다시 관광객 맞이할 채비 분주


여러 곡절을 겪은 하와이는 다시 관광객들을 맞이할 준비에 바빴다. 하와이관광청은 특히 하와이를 보살피고 배려한다는 뜻의 '말라마(Mālama) 하와이' 캠페인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 섬의 동·식물과 해양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산호초에 해를 끼치지 않는 자외선 차단제를 쓰고 일회용 식기나 종이컵 사용을 자제하고 해변을 청소하자는 내용이다. 관광객이 언제 다시 와도 하와이를 맘껏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원래 오버투어리즘으로 섬이 훼손되는 걸 우려해 마련된 이 캠페인은 이제 하와이섬을 살리는 방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요 관광지와 숙박 시설, 식당부터 푸드트럭까지 대부분 상업 시설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다니엘 나호오피 관광청장은 "푸드트럭에서도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를 따로 요청해야 준다"고 설명했다. 환경 보존을 위해 관광객 수를 제한하는 곳들도 많다. 영화 '쥬라기 공원'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쿠알로아 랜치에서 원하는 시간에 액티비티를 즐기려면 두 달 전 예약을 해야 할 정도다.

와이키키해변 앞 프린스호텔에선 투숙객에게 장갑과 손소독제, 장바구니 등으로 구성된 해변 정화활동 도구를 준다. 이 해변에선 아침부터 쓰레기를 줍는 여행자를 볼 수 있었다. 여러 숙박업소들은 나무 심기나 해변 정화, 해양 산호초 보호 활동에 참여한 투숙객에게 저녁 식사권이나 추가 숙박권을 제공한다.

건물 옥상 정원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하와이산 식재료를 키워 고객의 식탁에 올리는 팜투테이블을 실천하는 곳들도 있다. 호텔 관계자는 "팬데믹 직후 신선한 식자재와 인력 공급이 어려워지면서 자급자족하기 위해 시작했다"며 "레몬그라스나 로즈마리 같은 허브는 물론 상추·부추·오크라 등 채소, 메리골드 같은 식용 꽃과 열대과일 릴리코이까지 수중 재배 중"이라고 자랑했다.

글·사진·영상=마우이·오아후 박지연 기자
영상 편집 김광영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