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이 안 예쁜 그림을 고른 이유

입력
2023.12.22 12:00
10면

편집자주

매주 출판 담당 기자의 책상에는 100권이 넘는 신간이 쌓입니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본문을 한 장씩 넘기면서 글을 쓴 사람과, 책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이를 읽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활자로 연결된 책과 출판의 세계를 격주로 살펴봅니다.


연말 분위기가 더해가던 지난 18일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경식'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린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입니다. 1990년대 초쯤이라 해외여행이 흔치 않다 보니 해외 미술관 순례 류의 책이 많았습니다. 교양, 사색, 유머를 적당히 섞은 '블링블링한' 대리만족용 책이랄까요.

그런데 고인의 책은 달랐습니다. 책을 읽은 지도, 잃어버린 지도 오래돼 기억이 흐릿하지만, 잔혹한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문체는 또 얼마나 진중하고 어둡던지요. 그럴 법했습니다. 괜찮게 자랐다지만 일본에선 그저 '재일조선인'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손쉬운 간첩 조작 대상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에 공부하러 온 두 형 서승, 서준식을 고문하고 구속했습니다.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고, 형들의 옥바라지와 석방 운동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한참 뒤 또 다른 미술 에세이 '고뇌의 원근법'을 만났습니다. 역시나 '강렬한(!)' 그림들을 골라 놨습니다. 고인은 이렇게 써 뒀습니다. "나는 이들의 예술을 보고 '잘 그렸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얼마나 절실한 그림인가' 혹은 '얼마나 치열한 그림인가'라고 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들의 작품에서 정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격렬한 고투를 봤던 것이다."

'고뇌의 원근법'에서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을 찾아봅니다. 나치의 추적을 피해 숨어 살다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인 화가 누스바움. 쫓기던 누스바움이건만 유대인 신분증을 들어 보이는 태연한 표정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격렬한 고투였을 겁니다.

고인과 인연이 깊은 최재혁 연립서가 대표는 "내년에 '나의 아메리카 인문기행', '서경식 칼럼집', '나의 일본미술 순례2' 등이 유작으로 출간된다"며 "조촐한 추도식도 구상 중"이라고 합니다. 재일조선인의 격렬한 고투 또한 오래 기억되길 바랍니다.

조태성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