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이 극도로 어렵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한다. 1988년 1월 전 국민 대상 국민연금 제도 도입 이후 35년 동안 연금개혁은 1998년과 2007년 단 두 번뿐이었다. 1차 개혁 때 소득대체율(평균소득 대비 연금액 비율)을 70%에서 60%로 낮췄고, 수급 시작 연령을 5세(60세→2033년 65세) 늦췄다. 10년 가까이 지나 2차 개혁에서 소득대체율을 40%(2028년)까지 낮추기로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월 소득액의 9%로 올린 뒤 25년간 고정된 상태다.
급속한 고령화에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초저출생이 겹치며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계는 빨라지고 있다. 연금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과제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윤석열 정부도 '3대 개혁'의 하나로 연금개혁 추진에 나섰다.
국민적 기대감이 상승했지만 집권 3년 차를 앞둔 현재까지 개혁 성과는 미미하다. 연금 전문가들도 낙제 수준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개혁을 관철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명확한 개혁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한국일보는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상 가나다순)에게 연금개혁 중간 평가를 요청했다. 그간 각종 정책세미나와 포럼, 연구과제,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연금개혁 방향을 활발히 제시해온 전문가들이다. 이 중 남 교수를 제외한 4명은 올해 본보 '3대 개혁을 말하다' 필진으로 활동했고, 김 교수 이외 4명은 보건복지부의 연금개혁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에 민간위원으로 참여했다.
연금개혁의 성취 수준을 진단하기 위해 전문가 5명에게 5개 척도(A~E등급, 5~1점으로 환산)의 정량 평가도 아울러 부탁했다. 결과는 '바닥'에 가까웠다. A~E등급 중 A와 B는 하나도 없었다. 윤 연구위원은 E, 오 정책위원장과 양 교수는 D로 평가했다. 남 교수와 김 교수는 C를 줬다. 이들이 부여한 등급을 점수로 환산하면 평균 2.2점이다. 요컨대 'D학점'인 셈이다.
윤 연구위원은 "(국민들 사이에) 빠른 시일 내 보험료를 어느 정도 올려야 한다는 데 상당 부분 공감대가 형성됐는데도, 정부는 보험료율 인상까지 국회에 떠넘겼다"고 최저 등급을 준 이유를 설명했다. 오 정책위원장도 "법이 정한 재정 계산을 하고도 그것을 근거로 개혁안을 명확하게 내놓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양 교수는 "연금개혁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제를 만든 수준에 그쳤다"고 평했다.
남 교수는 개혁이 진행 중인 점을 감안해 "시간이 남아 있으니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의미"에서 C를 줬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재정 추계를 했고 전문가 위원회를 가동했다는 점"을 평가해 C등급을 매겼다.
전문가들의 비판은 정부가 최근 발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 집중됐다. 국민연금법은 연금재정의 장기적 균형 유지를 위해 정부가 5년 단위로 종합운영계획을 수립해 급여 수준, 보험료 등을 조정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연금 운영의 핵심 지표를 조정하는 '모수(母數)개혁'을 정기적으로 수행하라고 정부에 책무를 준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 1년간 재정계산위원회를 가동해 지난 10월 종합운영계획을 내놨지만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등 핵심 부분은 빈칸이었다. 의견이 다양하다는 이유를 들어 모수개혁을 국회 공론화로 넘긴 것이다. 1, 2차 연금개혁을 이룬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당시에도 소득대체율 하향에 반대하는 여론이 강했지만 기금 고갈을 우려한 정부가 앞장서 개혁안을 밀고 나갔다.
연금개혁이 미진한 이유를 객관식(△정부 의지 부족 △임박한 총선 △명확한 목표 부재 △대국민 소통 부족 △연금의 구조적 한계 △전문가 의견 불일치)으로 묻는 질문에 전문가 견해는 대동소이했다. 우선순위 2개를 고르는 방식이었는데, 2명(양재진 오건호)은 정부 의지 부족을, 2명(남찬섭 윤석명)은 명확한 목표 부재를 각각 1순위로 지목했다. 목표 부재는 2명(김태일 오건호)이 2순위로 짚은 이유이기도 했다.
윤 연구위원은 "25년 동안 보험료율을 1%포인트도 못 올렸는데, 2007년 반쪽 개혁 이후 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여건은 훨씬 더 나빠졌다"며 "연금 구조개혁을 하더라도 우선은 모수개혁을 위해 '최소 어느 정도까지는 보험료율을 올려야 한다'는 절박한 수치를 정부가 내놨어야 했다"고 밝혔다. 오 정책위원장도 "이건 리더십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며 "애초에 연금개혁을 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있었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1순위, 양 교수는 2순위로 내년 4월 실시되는 22대 총선을 연금개혁의 걸림돌로 봤다. 재정계산위 민간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소득대체율 상향을 최종 보고서에 담을지를 두고 갈등을 빚다 사퇴한 남 교수는 전문가 의견 불일치를 2순위 이유로 꼽았다.
다만 윤석열 정부 임기가 아직 전반부라, 연금개혁을 진전시킬 시간은 남았다는 게 중론이다. 전문가들은 총선 이후 연금개혁 불씨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예상했다. 기금은 2041년 적자 전환 뒤 2055년 소진(5차 재정추계)되고, 합계출산율은 내년에 0.7명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되는 등 국민연금 제도를 둘러싼 환경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베이비붐 세대가 경제활동을 할 때 한시라도 빨리 보험료를 올려야지, 이들이 다 빠져나가 연금 수급자가 되면 젊은 세대가 그 짐을 몽땅 짊어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연금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와 압박이 어느 때보다 강하다"(오건호), "현 상황을 감안하면 점진적으로 개혁을 이행하는 첫 발자국 정도는 임기 내에 뗄 것"(김태일), "하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역사에 남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윤석명)는 의견도 나왔다.
남 교수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의 공론화에 희망이 있다고 했다. 정부로부터 공을 넘겨받은 연금특위 민간자문위원회는 모수개혁안을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 △보험료율 15%·소득대체율 40%의 두 가지 조합으로 좁혀 공론화를 준비 중이다. 남 교수는 "국회와 정부가 공론화 이유와 그 과정의 중요성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려야 하고, 타협과 양보를 통해 의견이 모아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