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초반에 멈춘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과 높아지는 정권 심판 여론의 추이만 보면 금방 세상이 뒤집어질 것만 같다. 내년 4월 총선은 해보나 마나 아닌가도 싶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움직이는 지표도 있다.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쪽으로 규정하는지 묻는 주관적 정치 성향 조사 결과이다. 한국갤럽의 지난달 정치 성향 조사 결과를 보면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1%로 진보적이란 응답(26%)보다 5%포인트 높았다. 의외로 유권자 중 보수 성향이 더 많다는 뜻이다. 추세상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의혹이 터지기 전인 2016년 7월 같은 조사에서 보수는 30%, 진보는 25%로 집계돼 지금과 비슷했다. 그러다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전인 이듬해 1월 조사에서 보수 27% 대 진보 37%의 완연한 진보 우위 구도로 역전됐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보수는 늘고 진보는 줄어 격차가 완만해졌다. 그러다 대선이 있었던 지난해 7월 조사를 보면 보수 30% 대 진보 27%의 보수 우위로 회귀했다. 이후 지금까지 조사에서 보수 우위는 한 번도 뒤집히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과 보수 우위 지형 공고화라는 언뜻 상반된 결과가 공존하는 것에 대한 정치권 해석은 대체로 이렇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규제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같은 진보 개혁 드라이브에서 비롯한 피로감이 여전하고 내로남불에 대한 실망감도 가시지 않았다. 그 결과 변화보다는 안정과 내실을 희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유리한 운동장에서조차 현 정부·여당은 헛발질을 거듭하며 실점했다. 이념 선명성에 치중하거나 대통령 가족 문제로 인한 잡음이 부각됐고 여당은 직언하는 대신 대통령 심기를 살폈다.
국민의힘에서 험지라고 부르며 출마를 꺼리는 서울 등 수도권 사정은 더욱 극적이다. 지난달 조사에서 서울은 보수 36% 대 진보 23%로 보수가 무려 13%포인트 높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에게 18%포인트 넘는 격차로 압승했던 2021년 4월 조사에서 서울은 보수 25% 대 진보 26%로 팽팽했다. 유권자 지형은 그때보다도 훨씬 여당에 유리하다는 뜻이다. 인천·경기 또한 지난달 조사에서 보수 29% 대 진보 27%로 여당에 척박한 땅이 아니다.
이처럼 수도권 유권자의 상당수는 대통령과 여당이 조금만 잘했더라면 마음을 줄 준비가 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조금도 잘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의 지지율 정체로 나타났다. 이런데도 게으른 농부가 험지라며 밭을 탓하는 격이니 수도권 유권자는 더욱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총선까지 3개월여밖에 남지 않았다. 위기라며 띄운 당 비상대책위원장 후보로 그다지 비상하지 않아 보이는 인물들이 거론되는 것을 보면 변화 의지가 있는지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여당이 어영부영하다가 총선에서 지면 의석수를 몇십 석 손해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수 정부가 더 잘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인구 위기 완화와 의대 정원 확대 같은 개혁 과제 수행에 보수 우위 지형이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도 실패하는 것이다. 보수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