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베트남이 ‘미래 공동체’로 양국 관계를 재정립했다. 당초 ‘운명 공동체’로 외교 관계를 구축하려 했던 게 중국의 목표였으나, 베트남이 이름 변경을 고집하면서 표현이 다소 완화됐다. 중국은 미국에 비해 대(對)베트남 관계를 더 격상시켰다는 ‘실리’를 챙겼고, 베트남은 균형외교 기조 유지라는 ‘명분’을 얻어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13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서기장)는 양국 관계를 ‘인류 미래 공유 공동체(community of shared future for human kind)’로 재정립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지난 15년간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새로운 요구에 직면해 함께 새 공동체를 구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미래 공동체’는 그간 중국이 주창해 온 ‘인류 운명 공동체’와 사실상 의미는 같다. 하지만 다소 구속력이 완화된 표현이다. 중국은 자국 중심의 역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운명 공동체 개념을 내세우고 있다. 2012년 시 주석이 처음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와 다른 지역 개발도상국이 중국과 결집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맞선다는 의미가 담겼다.
실제 상당수 동남아시아 국가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나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협의체) 같은 공식적 협의기구는 아니라 해도, 라오스·캄보디아·인도네시아·미얀마·태국 등이 중국과 ‘운명 공동체’ 관계를 맺고 협력 의지를 다지고 있다.
중국은 베트남과의 관계도 ‘운명 공동체’로 높이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몇 해 전부터 베트남과 미국이 부쩍 밀착하자, 대미 견제를 위한 대응책이었다. 특히 올해 9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하노이를 찾아 최상위 외교 단계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CSP)’를 체결하면서 중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서자 격상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중국과 베트남은 2008년 CSP를 맺었다.
베트남 입장에선 최대 교역국이자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제안을 마냥 무시하긴 어려웠다. 결국 중국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베트남 정부가 이미 최고 수준에 달해 있는 양국 관계에다 외교 문서엔 없는 ‘포장’까지 씌우며 중국의 위치를 좀 더 끌어올려 준 셈이다.
그동안 베트남 정부는 중국의 요구에 대해 ‘미래 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맞서 왔다. 미국에 ‘중국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시그널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갈등으로 베트남 내 반중 정서가 강한 것도 이유로 꼽힌다. 베트남 정치전문가이자 군사전문기자 두안당은 “많은 베트남인에게 (중국과 베트남이)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표현은 너무 민감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운명 공동체’ 표현을 직접 거론하길 바라는 중국, 이를 조심스러워하는 베트남 간 입장차 때문에 시 주석의 베트남 방문이 당초 예상보다 늦어졌다는 후문도 나온다. 외교가 관계자는 “중국과 베트남이 ‘미래 공유’라는 단어를 두고 몇 달간 토론을 벌여 왔다”고 귀띔했다. 오랜 논쟁 끝에 중국은 베트남을 자국의 세계관에 끌어들였다는 상징성을, 베트남은 미중 사이 균형추를 맞추는 ‘대나무 외교’를 유지하면서 각자가 원하는 바를 절반씩 얻어낸 것이다. 물론 중국 언론들은 양국이 ‘운명공동체(命运共同体)를 구축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시 주석은 국빈 방문 이틀째인 13일 보반트엉 베트남 주석, 팜민찐 총리와 잇따라 회담했다. 양국은 △중국 윈난성 쿤밍과 북부 하이퐁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 추진 △베트남 내 5세대(5G) 이동통신망 구축과 이를 위한 중국의 해저 광케이블 설치 지원 등도 합의했다. 다만 중국이 협력을 촉구했던 희토류 등 주요 광물에 대해선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