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걸려 죽고, 총 맞아 죽고... 멧돼지는 억울하다

입력
2023.12.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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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외래질병과 포획의 희생양 멧돼지

편집자주

도심 속 인간과 동물의 접점이 늘어나면서 이로 인한 갈등과 피해가 생기고 있습니다. 갈등의 배경 및 인간과 동물 모두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택가를 한참 오른 뒤 도착한 인왕산 기슭. 비교적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니 껍질이 벗겨진 나무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 사는 멧돼지가 이용하는 '비빔목'이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 곳곳에 박혀 있는 멧돼지 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멧돼지 털은 가장자리가 갈라진 게 특징인데 실제 만져보니 엄청 질겼다. 대각선으로 긁힌 자국은 수컷 멧돼지가 이빨로 낸 것이다. 서문홍 국립생물자원관 기후∙환경생물연구과 환경연구사는 "껍질이 벗겨진 상태로 봐서 멧돼지가 최근까지 자주 사용한 것 같다"며 "등을 비빈 높이를 감안하면 덩치가 큰 편"이라고 설명했다.

멧돼지가 나무에 몸을 비비는 이유는 다양하다. 서 연구사는 "멧돼지는 진드기, 벼룩 등 외부 기생충에 약하므로 이를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나무에 비빈다"고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체취를 묻히는 행동은 수컷들 사이에서는 영역 표시 기능을 하고, 또 다른 성별 사이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산을 조금 더 올라가니 또 다른 비빔목이 나타났다. 비빔목 주변에는 삽으로 파헤친 듯 땅을 뒤집어 놓은 흔적이 뚜렷했다. 땅속에 묻힌 견과류, 지렁이 등 먹이를 찾기 위해 멧돼지가 코로 헤집어 놓은 것이다. 이 같은 행동은 생물다양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현지연 국립생물자원관 기후∙환경생물연구과 전문연구원은 "땅을 파헤치는 행동은 토양에 산소를 불어넣으면서 토양의 특성을 바뀌게 한다"며 "털에 식물의 씨앗을 묻힌 채 돌아다니는 행동은 식물 종을 퍼트리는 역할도 한다"고 소개했다.

산기슭이었지만 멧돼지 활동 구역은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와 크게 멀지 않았다. 이 같은 거리라면 멧돼지가 도심에 출몰하는 이유가 납득이 됐다. 서 연구사는 "이곳은 주택가와 멧돼지 서식지의 경계지역"이라며 "사람이 다니지 않는 밤 시간을 이용해 정상보다 먹을 것이 많고 물가 접근이 용이한 중산간, 저지대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멧돼지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사람에게는 주로 농작물을 해치거나 도심에 난입하는 유해조수,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매개체 등 피해를 주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멧돼지는 어쩌다 무엇을 해도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됐을까.

2019년부터 대대적 포획하게 된 배경은

멧돼지는 2005년 농작물과 분묘 등을 파헤친다는 이유로 유해조수로 지정돼 총기를 사용한 포획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환경부 자료를 보면 1㎢당 서식밀도는 1998년 5.3마리였다가 2010년 3.5마리로 줄었고 2018년 5.2마리로 늘어나는 등 등락을 반복해왔다. 수가 급격히 줄어든 계기는 2019년 ASF 발병이다. 환경부는 ASF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포획 정책을 펴면서 1㎢당 서식밀도는 2019년 6.0마리에서 지난해에는 1.1마리까지 줄었다. 환경부의 서식밀도 목표는 0.7마리다.

환경부는 포획을 늘리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지급하는 3만~10만 원에 달하는 포획 포상금과 별도로 2019년부터 마리당 20만 원을 지급하고, 지난해부터는 번식기에 성체(60㎏ 기준) 포획 시 10만 원을 추가 지급하고 있다. 그 결과 포상금 총지급액은 2019년 58억3,000만 원에서 2020년 187억8,400만 원으로 크게 올랐다가 지난해에는 122억1,500만 원으로 100억 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가 ASF 발병을 저지하는 데는 양돈 농가 보호 목적이 깔려 있다. 같은 돼지이지만 축산물로 길러지는 돼지를 위해 멧돼지를 죽이는 셈인 것이다. 질병생태학자인 황주선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연구이사는 "멧돼지가 ASF의 매개체로 지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도 래질병의 희생양"이라고 했다. ASF에 걸린 멧돼지의 치사율은 90% 이상이며 고열, 기립불능, 구토 등에 시달리다 대부분 열흘 이내 폐사한다. 국내에 ASF가 들어온 확실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멧돼지에 의해서든, 해외에서 가져온 식료품에 의해서든 사람에 의해 들어온 것만은 분명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개체 수 줄었다는데 도심에는 왜 내려오나

대대적인 포획으로 멧돼지 수는 줄고 있지만 도심에 내려오는 멧돼지를 사살했다는 뉴스는 끊임없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소방청으로부터 받은 멧돼지 출몰 신고 관련 처리 현황을 보면 2019년 5건에서 올해 10월 기준 12건으로 늘어난 인천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크게 줄었다.

신고 건수가 줄긴 했지만 멧돼지가 도심으로 내려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히려 도심 주변에서 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성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서울 북한산에 살고 있는 멧돼지 13마리에 위치정보시스템(GPS)을 달아 이동경로를 추적한 결과, 멧돼지들이 주택가 주변에서 활동하는 게 확인됐다. 이 선임연구원은 "GPS를 달아 방사한 멧돼지들은 주택가 주변에 설치한 포획틀에 잡힌 개체들"이라며 "이동경로를 확인한 결과 멧돼지의 도심 출몰이 큰 이벤트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 멧돼지가 번식기에 이동하는 과정에서 도심으로 내려오거나 도심 지역에 사는 멧돼지가 등산객 등에 놀라 쫓겨 내려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에 더해 ASF 확산을 막기 위한 포획 방식도 연관이 있다. 서 연구사는 "포획, 사체 수색 등으로 인해 압박을 느낀 멧돼지가 오히려 총기 포획을 하지 않는 도심지역으로 튀어나올 수 있다"고 전했다. 실제 국립생물자원관의 조사 결과 총기 사용 이후 멧돼지는 공업지, 상업지, 도로 등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출현할 확률이 높아지면서 사람과의 접촉 가능성과 로드킬 발생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됐다.

포획 수와 포획 방법 이대로 괜찮나

2019년 이후 지금까지 포획한 멧돼지 수는 약 41만 마리에 달한다. 문제는 대대적인 멧돼지 포획에도 초기 경기, 강원에 국한됐던 ASF 발병 지역이 충북, 경북으로 확산하는 추세에 있다는 데 있다.

ASF 확산 저지와 농작물 피해를 위해 개체 수 조절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어느 정도 포획이 불가피하다는 데에는 전문가들도 동의한다. 김영준 국립생태원 동물관리연구실장은 "ASF 확산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어렵지만 포획을 통한 멧돼지 개체 수를 줄임으로써 확산 속도를 늦추고 있다"며 "양돈농가들이 방역 조치를 하고, 백신을 연구하는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내 멧돼지의 개체 수 추정방식을 보다 정교화한 후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경부는 지난해부터 멧돼지 조사지점을 기존 100여 군데에서 2,550군데로 늘려 멧돼지의 흔적을 찾아 서식밀도를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선임연구원은 "멧돼지 흔적을 통한 조사방식은 실제와 크게 차이가 있다"며 "서식 밀도 기준이 아니라 ASF 확산현황, 농작물 피해현황, 도심 출몰현황을 보고 지역에 맞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ASF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포획뿐 아니라 폐사체 수거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 필요성도 제기됐다. 김 실장은 "ASF는 생존력이 강해 폐사체를 통해 전파되기 쉽다"며 "반면 폐사체를 찾는 데 전문 인력이 동원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실제 환경부에 따르면 매년 6만~9만 마리를 포획하고 있지만 수거된 폐사체는 2,000~3,000마리에 그치는 수준이다.

더불어 포획을 하더라도 인도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황 연구이사는 "현재 유해조수 포획도구의 하나로, 밟으면 발목을 낚아채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획트랩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며 "엽사의 출동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 멧돼지가 서서히 죽어가거나 다른 동물이 걸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만큼 제대로 된 사용 지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어 "실제 현장에서 포획업무를 하는 이들은 엽사"라며 "포획활동이 크게 늘어난 만큼 이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들에 대한 엄격한 관리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고은경 동물복지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