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도 '인도·태평양 헌장', 대한민국 첫 '월클' 보고서의 결론

입력
2023.12.18 04:40
24면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우리 외교ㆍ안보 분야의 이슈 분석과 해법 제시 수준이 이른바 ‘월클’(월드 클래스)로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전략보고서가 나왔다. 니어재단(이사장 정덕구ㆍ75)이 최근 국제 콘퍼런스를 통해 공개한 ‘세계, 어디로 가고 있는가(Quo Vadit Mundus)’ 보고서가 그렇다. 지금까지 국내 연구기관에서 나온 외교ㆍ안보 보고서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반도 주변 정세와 우리의 대응에만 매달린 것과 달리, 이 보고서는 전 지구적 이슈를 글로벌 관점에서 분석했다. 또 그런 분석을 거쳐 내놓은 해법도 80년 전 ‘대서양 헌장’을 대신하는 ‘인도ㆍ태평양 헌장’의 채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싱크탱크가 ‘글로벌 뉴노멀’을 찾아내고 해법을 제시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 건 정 이사장과 니어재단의 글로벌 네트워크 때문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외채협상을 주도했던 정 이사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ㆍ국회의원을 지낸 뒤 니어재단을 만들어 국가전략가로 변신했다. 올 하반기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방문연구원으로 지내며 워싱턴에서 직면해야 했던 고민과 새로운 네트워크가 이번 보고서의 핵심 추진력이 됐다는 평가다.

실제로 정 이사장은 워싱턴에서 돌아온 뒤 "한국의 국제 위상을 높이려면 외교ㆍ안보분야에서도 전문 연구자와 일반 시민이 한 단계 높은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 보고서 서문에서도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동북아라는 지구 한구석의,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 머물렀던 대한민국이 시계(視界)의 중심을 세계로 옮기고 주류국가로 발돋움하려면 더 넓고 높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생의 다자주의가 잠정적 해법

그렇다면 한국이 만든 최초의 ‘손흥민급’ 전략보고서가 주문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는 뭘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새로운 공생의 다자주의’(New Multilateralism of Symbiosis)다. 정 이사장도 “현재 지구는 국제 리더십이 혼돈에 빠져 상대 약점을 집중 공격하다가 지쳐가는 상황이며, 미국과 중국이 같은 곳을 바라보게 국제사회가 노력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촌 국가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따라 세계 정세와 해법을 뚜렷하게 달리 인식한다. 글로벌 웨스트(서방권), 글로벌 이스트(러시아ㆍ중국권), 글로벌 사우스(개도국 그룹)로 나뉜 국가마다 자신들의 프리즘을 통해 보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각각의 진영과 입장이 비슷한 국가끼리 뭉치는, 그리하여 입장이 다른 나라와는 멀어지는 글로벌 질서의 분열상이 심화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분열을 해소하려면 기존 다자주의에서 소외됐던 글로벌 사우스를 끌어들여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지적은 올해 유럽에서 나온 뮌헨안보회의 보고서와도 맥을 같이한다. 뮌헨안보회의 직후 채택된 보고서에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개도국들이 미국과 서방중심의 기존 질서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새 질서를 모색하려면 이들의 분노를 반영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는 공생의 다자주의 틀이 어느 정도 마련된다면, 1942년 선포돼 2차대전 이후 전후 질서를 규율한 ‘대서양 헌장’과 비슷한 무게를 갖는 새로운 국제 헌장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게 니어재단 연구진의 견해다.

전문가들은 물론 새로운 다자주의 아래서도 기존의 다자주의 기구의 역할의 강조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엔이나 세계무역기구(WTO) 등 기존 글로벌 기구를 개혁해야 하며, 그 개혁의 일환으로 2024년 미래 정상회의(Summit of the Future)를 준비하려는 목적에 따라 유엔 사무총장이 제시한 ‘새로운 평화의제’(A New Agenda for Peace) 보고서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월클 보고서' 속의 '월클 서베이'

니어재단이 이전의 보고서보다 분석 및 해법제시의 폭과 깊이가 완전히 다른 보고서를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지구촌 곳곳 외교ㆍ안보 전문가들의 의견을 다양하게 수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외교협회(CFR) 리차드 하스 명예회장, 리쳉 현대중국과세계연구소장, 시브랸카르 메논 인도 전 국가안보보좌관 등 글로벌 외교ㆍ안보석학 42명이 심층 서베이에 참여했다. 북미, 유럽, 인도ㆍ태평양, 유라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현재와 미래 세계질서 6개 카테고리 30여 개 질문에 대해 심층 해법을 제시했다. 때문에 이 보고서가 제시한 해법에 동의하지 않거나, 여전히 한반도 위주 시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구자들도 이 보고서와 글로벌 콘퍼런스를 통해 제시된 서베이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석학이 제시한 지구의 미래

우선 미중 전략경쟁과 관련, 석학들은 두 나라가 이른 시일 내에 화해할 가능성은 없다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35%가 ‘군사적 충돌 없는 장기간 갈등 지속’을 예상했고 15%는 군사적 충돌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양국이 갈등을 봉합할 것'이라고 예상한 20%의 전문가들도 그 시기는 5년 이후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들은 시 주석의 장기독재와 대만해협 주변의 긴장 가능성을 가장 우려되는 요인으로 꼽았다. 이어 미국과 중국의 경제관계에 대해서는 범용적 물품 관련 교역이 활발하겠지만, 인공지능(AI)과 같은 신흥기술 분야에서는 협력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주장했다.

이들 석학들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채택해야 할 전략도 소개했다. 대서양과 인도ㆍ태평양에 걸쳐 미국이 이미 구축한 다양한 소다자그룹(AUKUS, 쿼드, 한미일 3자 협력 등)을 줄곧 미국 편에 서도록 한다면 유엔이나 WTO 등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또 이러한 소다자협정들이 중단기적으로 미중 위기를 막는 국제사회의 협력도구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중국의 힘을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됐던 권위주의 체제의 협력 가능성은 낮게 봤다. 중국과 러시아가 제한 없는 동반자 관계를 선포했으나 이미 명백한 제한이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전문가들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대국 지위를 위협받고 있으며, 러시아에 부과된 제재가 향후 10년 동안 경기침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하스 CFR 명예회장은 지난 6일 열린 공개 콘퍼런스에서 “현재 국제사회의 급선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이 가능하다는 예외적 상황을 절대 만들어선 안 된다. 중국이 대만해협을 무력으로 위협하는 것도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전문가들은 인도ㆍ태평양 지역의 안정에 기여할 새로운 안보기구 설립에 대한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응답자의 다수인 37%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형식의 느슨한 협의체가 적합하다고 답했다. 이어 30%는 한미일 또는 한미일-호주, 쿼드(Quad) 같은 소다자주의 협의체를 선호했다. 한국과 일본, 호주, 뉴질랜드 및 일부 아세안 국가들이 참여하는 아시아 판 나토(NATO)의 창설을 지지한 전문가는 17%에 머물렀다.

강주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