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서필리핀해) 영유권 분쟁의 거센 파도가 중국-필리핀 관계를 침몰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양국이 바다 위에서 이틀 연속 물리적 충돌을 빚은 이후 일촉즉발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필리핀에서는 중국대사 강제 추방 목소리가 높아졌고, 중국은 충돌 책임을 필리핀에 돌렸다. 여기에 미국도 중국을 비판하고 나서면서 역내 갈등이 국제 분쟁으로 확산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11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이날 오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X(옛 트위터)'에 “중국 해안경비대와 민병대가 필리핀 선박에 자행한 침략과 도발은 오히려 우리의 주권 수호 의지를 강화시켰다”며 “중국의 위험한 행동은 노골적인 국제법 위반으로, 필리핀은 최근 사태와 관련해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중국 해경이 9일과 10일 스플래틀리(중국명 난사·필리핀명 칼라얀) 군도 세컨드 토머스 암초(중국명 런아이자오·필리핀명 아융인) 인근에서 필리핀 해경선과 물품보급선에 물대포를 퍼붓고 위협하자 정면 대응 방침을 시사한 것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중국을 직접 겨냥해 비판한 것은 지난해 6월 취임 이후 처음이다.
이 지역에서 중국 선박이 필리핀 선박을 향해 물대포를 쏜 것은 지난 8월과 11월에 이어 네 번째다. 중국 해경은 지난 2월에는 필리핀 선박을 향해 레이저를 겨냥하기도 했다. 중국은 100여 개의 작은 섬과 암초로 이뤄진 스플래틀리 군도를 비롯해 남중국해 약 90%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년 국제상설재판소(PCA)는 중국의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군사기지 등을 건설하며 인근 국가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필리핀은 중국의 물대포 공세에 외교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테레시타 다자 필리핀 외교부 대변인은 11일 기자회견에서 “황시롄 주필리핀 중국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며 “그를 ‘외교적 기피인물(PNG·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PNG 지정은 상대국 외교관의 지위를 박탈하고 강제 추방하는 강경 조치다. 주로 스파이 행위 등 주재국에서 주요 범죄를 일으킨 혐의가 있는 외교관에게나 지정하는 강수다. 가장 강경한 외교적 항의라서 웬만하면 잘 꺼내지 않는 카드인 점을 감안하면, 필리핀과 중국 사이 갈등 수위가 사실상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후안 미겔 주비리 필리핀 상원의장 역시 전날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황 대사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그는 중국의 지속적 공격을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촉구했다.
여기에 미국 등 필리핀의 우방국까지 가세하며 중국-필리핀 영해권 문제는 서방과 중국 간 갈등 구도로 비화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이날 매슈 밀러 대변인 명의 성명을 내고 “중국이 필리핀의 합법적인 해상 작전을 방해하는 것은 지역 안정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미국은 (중국의) 위험하고 불법적인 행동에 맞서 동맹인 필리핀과 함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뤽 베론 주필리핀 유럽연합(EU) 대사를 비롯해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대사 역시 중국을 비판하며 힘을 보탰다.
중국은 ‘적법한 대응’이라고 반박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필리핀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했고, 국내법과 국제법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한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또 필리핀 선박이 자국 해경선을 고의로 들이받았다고 주장하며 필리핀에 책임을 돌렸다.
서방을 향해서는 “중국과 필리핀 해상 분쟁은 양국 사이 문제로 제3자가 개입할 권리가 없다”며 “미국 등이 사실을 왜곡하고 분쟁을 확대해 지역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