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귀촌은 너무 거창하고, 그냥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간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누구나 한 번쯤 귀농귀촌을 꿈꾸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문제다. 양질의 일자리와 우수한 교육 여건, 편리한 교통, 풍부한 문화 인프라,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 등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이는 곧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회사법인 숲속언니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푸근한 ‘시골 할매’를 내세워 농촌에 살고 싶게 만든다. 지난 6일 경남 함양군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박세원(28) 숲속언니들 대표는 “언제든 놀러 갈 수 있는 할머니집이 콘셉트다. 그렇게 부담 없이 놀러 왔다가 좋으면 눌러앉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몇 년 전까지 박 대표의 진로 선택지에도 농촌은 없었다. 박 대표는 함양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충북 청주에 있는 대학에서 문화콘텐츠를 전공하고 서울에서 방송국 영상편집 인턴으로 일했다. 꿈에 그리던 일이었지만 생활은 팍팍했다. 끼니를 거르고 잠을 줄여도 늘 무언가에 쫓겼다. 삭막한 도시 생활은 곧 ‘나는 과연 행복한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답은 ‘글쎄’였다. 앞으로의 생활도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대로 짐을 싸서 2019년 함양으로 내려왔다.
초반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전통장류 제조업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농사의 기본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았고, 거기서 마음이 맞는 청년 농부 6명이 함께 농업법인 숲속언니들을 꾸리면서 농촌의 진짜 매력에 눈을 떴다. 숲속언니들의 사업은 온라인 매장을 개설해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파는 일에서 청년마을 운영으로 확대됐다. 박 대표는 “농촌이라고 해서 꼭 농사만 짓는 건 아니다”라며 “농촌도 얼마든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청년마을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건 지역민과의 유대감 형성이었다. 그래서 기획한 프로그램이 바로 ‘고마워 할매’ 프로젝트. 도시 청년들은 2주 동안 할머니 손맛이 담긴 요리를 배우며 지친 심신을 치유하고, 할머니들은 부엌에 숨겨둔 인생 레시피를 공개하며 자존감을 회복하고 외로움을 달랜다. 같이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배우고, 농사일을 하고, 밀키트도 개발하는 등 취미생활과 생계활동 전반을 공유한다. 지난달에는 할머니들과 팝업식당을 열기도 했다. 할매니얼(할매+밀레니얼) 트렌드와도 맞물려 불과 보름 남짓한 영업 기간에 500여 명이 다녀갔다. 군 전체 인구(3만7,000여 명)로 따지면 100명 중 1명 이상은 이곳을 들른 셈이다. 박 대표는 “시골에 와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이 할머니들”이라며 “할머니들과 친해지면 낯선 시골 생활도 금세 적응한다”고 말했다.
할매의 맛을 잊지 못해 거주 기간을 연장하거나 아예 정착한 청년들도 생겨났다.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정수경(28)씨와 김승현(26)씨도 그렇게 함양사람이자 숲속언니들 멤버가 됐다. 대학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퇴사한 정씨는 “지난해 9월 함양살이 후 아예 이사를 왔다”며 “청년들끼리만 파이팅을 하지 않고 할머니랑 같이 사부작사부작 대고 살 수 있는 게 좋았다”고 했다. 방송국 작가였던 김씨는 “내가 이렇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이만큼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에 매몰돼 그걸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더라”며 “지금은 뭘 대단하게 이루지 않아도 그냥 삶 자체가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프로젝트가 인기를 끌면서 35평짜리 게스트하우스 하나로 시작한 사무실은 장기거주를 희망하는 참여자를 위한 숙소 ‘이어랑’, 제철 식재료 팝업 식당 ‘함무랑’, 전시 및 세미나 공간 ‘우리랑’, 청년 오픈 마켓 ‘모여랑’, 숲속언니들 사무공간 ‘들랑날랑’ 등 9개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지원사업에도 선정됐다. 3년간 6억 원을 지원받는다.
적지 않은 성과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다시 수도권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 한계를 느낀다. 최근에도 중국어를 전공한 참가자가 일자리를 찾다 결국 두 달 만에 다시 서울로 갔다. 젊은층이 소비할 만한 문화가 부족한 것도 아쉽다. 그래도 숲속언니들은 자신들을 통해 ‘농촌에서 뭐 할 게 있나?’라는 생각이 ‘뭐든지 할 수 있지’로 바뀌길 바란다.
“청년들이 도시로 나가는 이유는 사실 수두룩해요. 경중만 다를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에 머물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2주가 됐든 2년이 됐든 상관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