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대만에 대한 중국의 막판 공략을 차단하는 변수가 됐다. 중국 공산당은 치열한 내전 끝에 대륙을 장악하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완전 붕괴하지 않은 채 대만으로 거점을 옮긴 상태였다. 이에 신생 중국은 “1950년의 가장 중요한 전투임무는 대만 등을 해방시키는 것”이라며 완전한 중국 통일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이 중국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 대만을 포기한 채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용군) 사상자 수는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을 포함해 약 6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중국군의 막대한 희생을 바탕으로 북한과 중국은 ‘혈맹’이 됐고, 1961년 체결된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에 따라 체약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거나 개전상태가 되면 상대방도 즉각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키로 했다. 요컨대 한국전쟁이 북한과 중국을 혈맹이자 공산권 내에서도 유례가 드문 강력한 군사동맹으로 묶은 셈이다.
▦ 한편 한국과 미국은 이보다 8년 앞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역시 혈맹 수준의 군사동맹을 구축했다. 상호 군사원조는 물론, 미군의 한국 주둔까지 양허하는 수준이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은 전략적으론 북한 침공 시 미군의 자동 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한미, 북중 간 강력한 군사동맹체제는 근년 들어 대만 문제가 미중 대립의 주요 축으로 부상하면서 한반도 안보에 새로운 숙제를 던지고 있다.
▦ 알려진 대로,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이래 해외 주둔군에 ‘신속기동군’ 개념을 도입해 유사시 주둔지뿐만 아니라, 해당 광역권역 내 전장에 이동 투입하는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만에 하나 중국이 대만을 무력침공하면 주한미군 전력을 현지에 투입하는 식이다. 문제는 그 경우, 중국과 동맹인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후방기지를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주한미공군이 싱가포르까지 날아가 현지 공군과 연합작전을 벌였다는 소식에 잠재된 한반도 안보 위험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