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기내 서비스 후식으로 주는 홍콩의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은 1960년부터 우리나라에 취항, 낯설지 않은 항공사다. 그러나 사명 중 캐세이의 어원이 거란(契丹)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契丹을 중국어로 읽으면 ‘치단’인데 이는 거란이 스스로를 키탄(Khitan) 또는 키타이(Khitai)로 부른 걸 한족이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11세기 북중국을 장악한 거란은 1125년 금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해 카라키타이(서요)를 세우고 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키타이나 카타이란 말이 서양에선 중국을 뜻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북중국을 카타이(Cathai)로 지칭했다. 영국계 창업자가 항공사 이름을 정하며 차이나(China) 대신 ‘캐세이’를 선택한 연유다.
□ 키타이가 서양에선 중국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거란의 위세는 높았다. 그런 거란이 1004년 송과 강화조약을 맺은 뒤 고려를 침공했다. ‘코리아(Korea) 키타이 전쟁’인 셈이다. 이때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신출귀몰의 작전을 편 이가 양규다. 그는 1010년 흥화진(현 평북 의주)에서 40만 명의 거란 대군에도 성을 굳게 지켜냈다. 이어 거란군이 남진하자 흥화진을 나와 1,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6,000명이 지키는 곽주성을 공격, 성에 갇힌 7,000명의 백성까지 구해 냈다.
□ 성을 함락시키려면 성을 지키는 병력의 4배는 돼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4분의 1 군사로 이룬 곽주성 승리는 기적이다. 이후에도 양규는 돌아가는 거란군을 무로대, 여리참, 애전 등지에서 공격하며 한 달 새 일곱 차례 적과 싸워 7,000명 가까이 베고 포로 3만여 명을 구했다. 그의 목적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살리는 것이었다. 고려거란전쟁 1차와 3차전 영웅이 서희와 강감찬이라면 2차전은 양규다.
□ 고려는 당시 세계 최강국 거란을 물리쳤다. 이를 다룬 KBS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인기다. 그동안 조선시대에 편중됐던 TV 사극의 무대가 고려로 확장된 건 반갑다. 지금 우린 화폐 인물도 모조리 조선시대다. 우리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