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패션업계는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해외여행이 증가하고 '3고 (고금리·고환율·고물가)' 현상이 이어지면서 소비자들이 예전과 비교해 패션 제품을 사지 않고 지갑을 빠르게 닫은 것. 올해 3분기(7~9월) 한섬의 영업 이익은 73%,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영업 이익은 75.1% 고꾸라졌다.
하지만 가성비 의류로 꼽히는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만큼은 정반대였다. 탑텐·스파오·에잇세컨즈와 같은 국내 SPA 브랜드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전략적으로 원가 절감 정책을 유지하고 고객의 취향을 절묘하게 반영한 상품들을 내놓으며 적극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①앤드지, 지오지아, 올젠 등 국내 패션 브랜드들을 운영하고 있는 신성통상은 SPA 브랜드 탑텐으로 올해 첫 9,000억 원 매출 돌파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해 유니클로(8,036억 원)에 이어 SPA 브랜드 매출 2위(7,800억 원)를 기록했던 탑텐이 유니클로의 굳건한 1위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지 업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탑텐은 사상 최대 성적을 거둔 비결로 스타일 다양화, 활발한 오프라인 매장 확대 등을 꼽았다. 상반기에는 기능성 냉감 소재 의류인 쿨에어, 쿨에어 코튼 등 탑텐의 인기 상품을 속옷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하반기에는 기본 아이템뿐 아니라 트렌드를 반영한 스타일도 더 늘렸다. 탑텐의 발열내의 온에어, 운동복 라인인 밸런스 애슬레저, 속옷라인인 밸런스 언더웨어 등 핵심 아이템도 강화했다.
여기에 지금까지의 교외형 매장과 소규모 매장에서 중·대형 규모의 도심형 매장을 늘리면서 지난해 555개였던 매장 수도 690개까지 확장했다. 탑텐 관계자는 "내년에는 1조 원 매출 달성을 위해 브랜딩을 공격적으로 펼치고 지속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팬덤을 강화하는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②이랜드가 운영하는 스파오 역시 지난해 매출 4,000억 원에서 올해 5,000억 원 달성을 바라보고 있다. 스파오는 기존 20대 중심의 마케팅에서 벗어나 4050 중년 세대로 소비자층을 넓히고, 특히 모든 연령대가 입을 수 있는 상품은 가격을 전략적으로 내렸다.
이랜드는 '고객이 필요로 하는 수량의 의류만 만든다'는 모토로 의류 재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랜드만의 전략인 '2일 5일 생산기법'을 사용한다. 국내 의류 생산 시설에서 48시간 만에 200장 내외의 의류를 만들어 주요 매장에서 고객 반응을 테스트하고, 그 결과에 따라 베트남 등 이랜드 글로벌 생산 기지에서 120시간 안에 필요한 물량만큼 생산해 국내 매장 판매까지 완료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전략이 빛을 발하기도 했다. 최근 경기 성남시 스파오 야탑점에서 소량 생산으로 출시된 스트레치 슬랙스가 주부 고객을 중심으로 좋은 반응을 얻자 닷새 만에 서울 영등포구 스파오 타임스퀘어점까지 빠르게 판매, 30대 이상 고객의 입점 비중이 20%포인트 상승하기도 했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캐릭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까지 다양한 분야와 손잡고 내는 '컬래버 파자마' 신상품도 지난해 18개에서 올해 19개로 늘었다. 컬래버 파자마는 3년 동안 누적 매출액 1,000억 원을 돌파한 스파오만의 무기. 올해는 담곰이, 다이노탱,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가비지타임, 스위트홈 등과 컬래버 파자마를 선보였다. 스파오 관계자는 "2018년 '2일 5일 생산기법'으로 막 유명해지던 '펭수' 캐릭터 협업이 성공하면서 국내 브랜드들과 더 활발하게 손잡고 있다"며 "컬래버 파자마는 연간 100만 장씩 판매되며 스파오 최초 밀리언셀러 아이템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③국내 패션업계 1위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는 올해 프리미엄 라인을 론칭하며 가성비 의류에서도 구별 짓기를 원하는 소비자들을 겨냥했다. 올해 초 Z세대를 위한 프리미엄 캐주얼 라인 '유니에잇(UNI8)'과 소재를 고급화한 프리미엄 여성 라인 '에디션에잇(EDITION8)'을 선보였다. 모두 기존 에잇세컨즈 상품보다 약 20~30% 가격대가 높다.
에잇세컨즈는 프리미엄 라인이 올 상반기 기준 95% 이상의 판매율을 기록했고 하반기에도 50% 가까이 판매율을 올리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11월 말 누적 매출 기준 전년 동기 대비 10% 이상 신장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관계자는 "소비 침체가 이어지면서 중상위층 브랜드 소비자들이 가성비 상품으로 넘어오게 됐는데 기존 가성비 상품과 다른 스타일을 원하는 고객을 겨냥했다"며 "H&M 그룹에서도 아르켓, 앤아더스토리, 코스 등 다양한 스타일의 SPA 브랜드로 영역을 넓히는 것을 참조했다"고 밝혔다.